되돌아보는 6.25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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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6.25 한국전쟁
  • 승인 2004.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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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는 과연 올 것인가.”

반세기를 넘긴 현재 우리나라 형편은 평화실현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긴장의 연속이다. 북핵문제와 열매없는 6자회담, 이라크전쟁에서 드러나고 있는 미국의 강경군사정책 그리고 세계 2위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라크 원유를 둘러싼 유럽과 중국, 미국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등이 세계와 한반도를 동시에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최근의 정세는 50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형국과 대동소이하기까지 하다. 한국전쟁은 바로 반세기전 공산진영을 이끈 소련의 동진남하(東進南下)정책과 자유민주진영을 이끈 미국의 봉쇄(封鎖)정책이 빚은 ‘참담한 파국’이라고 할만 하다. 6.25한국전쟁을 안다는 것은, 따라서 ‘올바른 이념’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비뚤어진 이념’이 민족에 끼치는 악영향의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지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일제패망과 해방 그리고 분단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1945년 8월6일,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문제 처리에 고심하며 불과 열흘 전에 합의한 포츠담선언(45.7.26)내용대로 ‘한반도 분할통치’를 실시키로 했다. 이 포츠담선언은 그로부터 5개월 전 열린 얄타회담(45.2.)의 결과였던 ‘비공식 신탁통치’를 재확인한 것이기도 했다. 미국 영국 소련 중국(대만)등 한반도 인근국가 및 2차대전 승전국들은 일본이 통치했던 지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일본패망 2년 전인 1943년부터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한국독립을 잠정합의한 ‘카이로회담’이 그 증거다.

여하튼 우리나라는 강대국의 각본에 따라 북측은 소련이, 남측은 미국이 주둔하는 형식을 띠며 45년 9월2일 38선을 확정하는 한편 3년 후인 48년 38선 이남은 8월15일에, 이북은 9월9일에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주권국가임을 천명하게 됐다. 이 과정 속에서 찬탁/반탁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겪어야 했고, 형제 이웃간에 이념갈등이 끊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기어코 일어난 전쟁과 UN의 지원

일제패망 이후 식민국가 처리문제의 하나로 이루어진 38선 분할통치는, 볼세비키혁명 성공으로 최대 공산주의를 이룬 소련과 이를 저지봉쇄하려는 미국의 각축이 빚은 결과였지만, 해방이후 아무런 대안을 준비하지 못한 당시 지도층의 외세의존적 감상주의의 결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난무하는 이념과 이를 추종하려는 이합집산이 강대국의 ‘한반도 임의분할’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공산 소련의 제국적인 야심은 북한공산화를 넘어 미군정 상황인 남측공산화로 확대됐다. 당시 남북협상을 진행하던 중이었지만 북측의 속셈은 남측공산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50년 6월25일 새벽 4시를 기해 소련제 각종 무기로 무장한 북측의 인민군은 국제법이 정한 38선을 넘었고, 3년 가까운 참혹한 살육전을 만들고야 말았다. 한국전쟁은 긴급 의제로 열린 UN안보리의 결의안을 이끌어내면서 출동한 UN군의 도움으로 예측 못한 중공군의 개입이 있었음에도 그나마 휴전선 부근에서 휴전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

소련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많은 것을 계산에 넣었다. 38선 이북과 이남에 진주한 외국군대의 무조건 철수를 주장하며 미국군의 철수를 유도한 것이다. 소련이 노린 것은 무엇일까. 소련은 미국이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지정학적 약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이 한국전쟁에 투입되더라도 북한군의 진격을 막지 못할 것이란 계산아래 미군철수를 주창했고 실제로 미군은 소수병력만 남기고 철수했던 것이다. 압록강만 넘으면 북한에 도달하는 소련군의 입장과 전혀 달랐던 상황에서 한국전쟁은 그렇게 아무런 제지없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런 까닭에 낙동강전투는 너무나 소중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참전UN군이 도착해서 전쟁투입까지 걸리는 기간동안 버텨야 하는 처절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나이어린 학도병들은 총알받이란 사실을 알고서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전장의 싸늘한 주검이 돼야 했다. 결국 UN군은 북으로 다시 밀고 올라갔고 그토록 그리던 서울을 되찾는 감격을 안았으나 중공군의 개입을 둘러싼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통일한국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구시대적 냉전의 현실

한국전쟁은 2백49만여명의 민간인을 살상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한국군과 UN군 총77만7천3백60명이 전사하거나 사망했으며, 38만 여명이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낸 비극이었다.

휴전협정은 아직 유효하다. 이 말은 언제든지 전쟁의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전쟁방지는 휴전협정을 정전협정으로, 나아가 평화협정으로 진척돼야 가능하지만 아직 이렇다할 진전전망은 없다. 그마나 7.4남북공동선언을 시작으로 지난 2000년 김대중-김정일 남북 정상들의 선언이 희망찬 미래를 예견하게 할 뿐이다.

미국과 소련 양극체제로 전개된 냉전시대는 이미 지난 91년도를 기해 완전히 갔지만, 아직 우리나라 한반도에서는 구시대적 냉전체제가 청산되지 못한 채 부끄러운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해방이후를 대비하지 못해 초래한 과거의 씻지 못할 과오를 교훈삼아, 이제 분단이후를 설계하는 지혜로움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새 힘을 얻도록 해야 한다. ‘사람의 위기는 곧 하나님의 기회’라는 말을 지금 현재 상황에 적용할 때 우리는 이념에 편승하는 얄팍한 처세술을 지양하고 복음을 담을 수 있는 ‘자유민주’라는 새 부대를 만드는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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