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을 이겨내지 못할까봐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그리운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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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을 이겨내지 못할까봐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그리운 순교자
  • 민경배 박사
  • 승인 2020.11.1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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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배 박사에게 듣는 ‘코로나와 한국교회’ ⑧ - 순교자 주기철: 인간 주기철

인간 주기철
주기철 목사는 순교자로 우선 알려져 있다. 그는 그렇게 인간적이었다. 누구든지 가서 손잡고 싶은 그의 인간상, 우리 현대사의 다른 한 기념비이다. 기독교 인간상의 기념비다.

주기철: 서북신앙에 등재
주기철 목사는 고향이 경남 웅천이다. 한데 그는 고등학교를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 가서 다니고 1916년 바로 개교한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한다. 순교자가 다닐 학과로서는 난데없다. 안질로 학업은 계속 못하고 결국 몇 년 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가 1925년 졸업한다. 

부산의 초량,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마침내 1936년 서북장로교 신앙의 본산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거기서 1938년 처음 구속, 1940년 4차로 구속되고는 1944년 4월 21일에 평양감옥에서 순교한다. 왜 평양에 갔을까. 

당시 목사들은 평양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이 한국의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관문이었다. 

주기철: 그 소박한 인간상/ 오정모 사모와
주기철, 그러면 엄격 준엄한 성자의 모습과 함께 우리가 다 친근미를 피부로 느끼는 인간 그 고향의 아련함이 꽃핀다.

우선 마산에 있을 때 그의 부인 안갑수 사모가 세상을 떠나 얼마 후 마산여고의 교사였던 지적이고 총명한 오정모와 재혼한다. 홀애비가 처녀에게 장가들면 처녀의 교만을 참아야 한다. 많이 참고 산 모양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자미 있는 사실’이라 실토한다.

순교 얼마를 앞두고 평양 감옥을 마지막으로 찾았던 오정모가 주 목사에게 “승리하여야 하오”라고 다짐하였을 때다. 주기철은 마지막으로 “나 따사한 숭녕 한 그릇 마시고 싶어.” 오정모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들은 지아비의 말이었다. 오정모는 돌아오는 길에 한없이 울고 있었다. 한번 되돌아나 볼 것을! 우리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다. “내가 목마르다!”

어머니 때문에
주기철이 마지막 한 것으로 알려진 ‘5종목의 나의 기원’이란 설교가 있다. 거기 노모와 자녀들, 병고의 아내를 두고 순교의 길을 가야하는 아픔 때문에 절절히 말을 잇지 못한다. “나도 노모가 있고 아이들이 있습니다.” 오래 감옥에서 받는 고난을 참기 어렵다고 말한다. 자기는 약질인데 견뎌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오랜 고문의 고통을 인내하지 못할세라 기도한다. 거인 주기철이 보인 이 순수한 이미지, 바로 주기철이 우리 순교사에서 빛나는 까닭이다.

소나무는 살았을 때 찍어야
주 목사가 평양감옥에 있을 때 저 멀리 감방에 안이숙이가 역시 갇혀 있었다. 한데 주 목사가 형방에서 고문을 받고 감방에 돌아와서는 찢어진 옷을 꿰매고 빨고 몸을 씻었다고 한다. 

주님 앞에 언제 갈지 모르는데 그때 맑고 환한 모습으로 가야할 거 아닌가 하고. 그러면서 말했다고 한다. 소나무는 살았을 때 찍어야 푸르고 장미는 피었을 때 꺾어야 향기롭다고.

순교자는 초인이 아니었다. 우리와 꼭 같이 웃고 아프고 섧고 그립고 목마른 사람이었다.

민경배 박사(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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