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벨리를 사로잡은 여성 엔지니어 박순덕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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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벨리를 사로잡은 여성 엔지니어 박순덕 성도
  • 승인 2004.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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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좌절 …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 실현 “도전해서 안되는건 없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뛰어 들어 ‘현대 문명의 쌀’이라는 반도체를 만드는 인텔(Intel), 삼성, 모토롤라, NEC, 미쯔비시 등 유수의 회사들을 누비며 장비 엔지니어로 활약한 당찬 여자 박순덕씨(36·대소원감리교회:황대성목사).

충청도의 산골 마을에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난 박순덕씨는 어린 시절부터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지금은 그 꿈을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구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실리콘밸리에 자리 잡은 반도체 장비 회사에 몸을 담고 세계를 다니며 중장비를 설치하는 엔지니어가 되었다.

지난 22일 화촉을 밝힘과 동시에 자서전 ‘멋진 세상은 프로가 만든다'의 출판 기념회를 위해 일시 귀국한 박씨는 책의 출판 배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을 써내려 갈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이유는 지금까지 살아 온 제 짧은 삶 속에서 내가 경험한 세상일이 분명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박순덕씨는 특별한 명예나 지위를 가진 사람도, 화려한 연예인이나 돈 많은 재벌가의 딸도 아닌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아니 어쩌면 지극히 초라하게 오신 예수님의 삶 만큼이나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자신이 소원한 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삶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끊임없이 노력하며 달려온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박차고 일어서지 않으면 자신이 설 수 없다는 한가지 극단적인 방법으로 살아온 것이 박씨의 경험이다. 1980년대 초, 웬만한 사람이면 다 들어갈 수 있었던 중학교를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부모님은 박씨를 중학교에 진학시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중학교만이라도 졸업해야 공장에 취직할 수 있다는 동네 사람들의 얘기로 부모님을 설득해 읍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행복했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가난에 쪼들린 생활은 부모님과의 대화를 단절 시켰고 가족과의 대화가 간절했던 박씨는 동네 뒷동산에 자신만의 수많은 기도를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힘겨운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하고 있었을 때 남학생만이 입학할 수 있었던 공업고등학교의 입학 문이 여학생들에게 처음으로 열렸고 '전자공학과 기술'이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과감히 도전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여학생들의 공업 고등학교로의 진학이 따뜻한 시선만은 아니었다. 여자가 얌전치 못하게 거칠거나 학업을 게을리 해서 기름이나 묻히고 납땜이나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른바 '공순이'라고 치부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씨는 어린 시절부터 뜨개질 같은 잔손 가는 일보다 납땜질이나 실험도구와 같은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한 연유로 이웃사람들은 고장 난 가전 제품들을 이따금씩 박씨에게 가져왔고 척척 고쳐 주기도 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시장에서 예쁜 전기 밥솥을 사왔다. 새로운 밥솥의 출현을 그냥 둘리 없었다.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어린 마음에 밥솥의 내부구조가 궁금해 모두 분해를 한 적도 있었어요. 그리고는 어머니가 오시기전 서둘러 조립을 했지만 밥솥은 이미 고장이 나버렸고 어머닌 영문도 모른 채 밥솥회사에만 역정을 내시고 전파사에서 고쳐 오신 일도 있었어요.”

이렇듯 공업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지식과 기술로는 그녀의 지식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무엇보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열망이 박씨의 마음을 움직였지만 진학의 바램은 가난이란 배경을 떠올리면 사치일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공장 일을 하며 학원도 가지 못한 채 박씨는 재수를 결심했다. 시간이 흐른 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학비를 어머니에게 빌려주고 받지 못해 상심하던 어느 날 큰 형부의 조언으로 시험을 치른 공업전문대학에 합격했다.

짧은 머리 구겨진 청바지, 손에 잡히는 대로 걸쳐 입은 티셔츠를 입고 남자들만이 득실대는 강의실에서 이리 저리 강의로 실습으로 쫓아다니면서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 않고 낮에는 공부, 밤에는 양말공장에서 일하며 이른 바 주독야경에 빠졌다. 힘겨운 시간이 흘러가면서 대학을 졸업했고 여전히 여성에게 냉대한 전기기술직 업무에 한계를 느끼며 기술직에서도 남녀 평등한 미국유학을 결심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조그만 학원을 찾게 됐고 그녀의 힘든 결정에 학원 원장은 저렴한 강습비로 지도할 것을 약속했다. 그렇게 수업이 시작되면서 원장은 대책 없는 박씨의 앞길에 멘토의 역할까지 감당하며 급기야 박씨를 예수님께로 인도했다. 영어학원의 원장실은 마치 목사가 시무하는 목양실을 방불케 할 정도의 사무실을 보며 한눈으로 크리스천임을 알았지만 몇 차례 수업을 받아도 전도할 기미를 찾을 수 없어 박씨가 더 초조해졌다. 당시 학원 원장의 전도방식이 일반적인 크리스천들의 전도방식과는 틀렸던 것이다.

“평소 크리스천들에게 반감이 많았던 저였지만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원장님은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 강조하지 않고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며 저를 설득시켰죠. 이후 그렇다할 이유 없이 자연스레 자진해서 교회를 출석하며 주님을 영접하게 됐어요." 미국유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가운데 인디애나주립대학의 합격통지를 받을 무렵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마지막 준비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출국하기 전까지 긴 시간동안 쌓여 왔었던 어머니와의 막힌 담이 뚫어졌고 모녀간의 정이 두터워 갈 무렵 박씨는 미국 시카고로 출발하는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미국의 생활도 생각만큼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영어가 능숙하지 못했기에 수업도 너무나 힘이 들었고 룸메이트와도 어색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럴 때마다 박씨는 더욱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렇게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영어실력은 늘었고 토플 시험 점수도 날이 갈수록 향상됐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영어 실력과 자신감은 박씨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영어를 터득했다는 것 외에는 별 성과 없이 무수한 상처만을 끌어안은 채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 저 이제 어떡하면 좋아요, 모든 꿈이 깨어지고 희망조차 잃어버린 채 당신 앞에 무작정 왔습니다. 옛날의 저는 다 망가지고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가는데도 아무도 저를 일으켜주지 않아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죠. 이렇게 쓰러질 수 없어요. 다시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저를 일으켜 주세요."

귀국 후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제출하며 손쉽게 일할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일이 흘러 미국에 본사가 있는 반도체 회사의 한국지사에서 연락이 왔고 박씨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요청으로 당당히 합격하게 됐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돌보며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박씨는 그때서야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또 의심 많은 도마처럼 모든 일을 주께 맡기지 못하고 인간적인 마음이 먼저 앞섰던 것을 주님 앞에 회개했다. 정식으로 입사한 후 미국 실리콘밸리의 본사에서 본격적인 장비교육이 실시되었고 이와 함께 박씨에게 아파트와 자동차가 주어지면서 그녀의 본격적인 ‘아메리칸 드림’이 시작됐다. 충청도 산골 소녀가 가난하다 못해 한 끼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처지에서도, 또 여자에게 굳게 닫힌 기술분야에서 악착같이 뛰고, 또 뛰어서 미국 회사에 당당히 입사해 꿈에서조차 바라고 기대했던 실리콘밸리에 입성하기까지 결코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고 박씨는 말한다.

“힘들어 좌절하고 싶을 때 주님께서 주신 평안과 용기로 헤쳐갈 수 있었고 끊임없는 자기개발로 인해 바라는 것들을 이룰 수 있었죠." 지난 22일 '파란 눈을 가진 사나이'와 결혼식을 올리며 다시 한번 희망의 기지개를 펴는 박순덕씨는 이렇게 말했다. “멋진 세상은 프로가 만든다”.

송준영기자(jysong@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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