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마저 얼려버린 달동네의 겨울…“올해는 마지막이길”

신년 르포//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의 새해 소망 한현구 기자l승인2019.01.03 15:33:24l수정2019.01.07 03:38l14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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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후반 강제 이주로 형성…젊은이 떠나고 노인만 남아

매년 말로만 끝나는 재개발 소식에 상처 쌓여가는 주민들

12월 13일, 하얀 눈이 온 서울을 뒤덮은 날이었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당장 출근길이 걱정인 도시 사람들에게 눈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다. 정든 하늘을 떠나 지상에 놀러온 순백의 아기천사들은 내려앉아 숨을 돌리고 세상을 둘러보기도 전에 가차 없이 쓸려 내려간다. 조금만 지나면 서울은 언제 눈이나 왔었냐는 듯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런 서울에도 여전히 ‘눈의 고장’은 있었다. 국경의 긴 터널까진 지나지 않아도 좋다. 노원구 공릉터널을 지나 중계본동종점에 다다르면 만날 수 있는 곳, 바로 백사마을이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는 이곳은 서울 시내의 바쁜 일상은 딴 세상 이야기인양 한적하다.

백사마을은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에 위치해 붙여진 이름이다. 1960년대 후반 개발에 밀려 쫓겨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자리 잡았다.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면서 수리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는 마을의 집들은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목재, 깨진 벽돌로 위태롭게 옷을 여미고 겨울이 지나기만을 기다린다. 한때는 거리마다 사람들로 북적대 꽤나 소란스런 동네였다. 하지만 지금은 젊은이들이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추억의 공간을 지키고 있다. 수십 년 전 서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곳을 찾아 얼마 남지 않은 마을의 이야기를 담아봤다.

▲ 겨울의 추위는 누구에게나 평등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몸을 숨긴 백사마을 주민들에게 겨울은 매섭기만 하다.

빈집, 고양이, 그리고 연탄냄새

노원역에서 1142번 버스를 타고 중계본동종점으로 향했다. 일전에 한 번 마을입구를 방문했던 기억을 어렴풋이 더듬어가며 마을로 발을 옮겼다. 시간은 오후 네 시. 겨울이면 퇴근시간을 칼 같이 지키는 태양은 벌써 자취를 감출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을 초입에는 연탄 봉사를 막 끝낸 봉사자들이 주변 정리에 한창이었다. 카메라를 목에 건 기자의 모습이 이들도 낯설지 않은 듯 했다. 봉사자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고 지나치자 ‘중계동 104마을 이야기’ 표지판과 마을 안내 지도가 기자를 반겼다.

비교적 완만했던 경사는 표지판을 기점으로 가팔라졌다. 가까이서 바라본 백사마을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황량했다. 곳곳에 ‘빈집’임을 알리는 구청의 스티커가 나부꼈다. 폐허에 가까운 모습의 공가(空家)들은 이미 사람의 발길이 끊긴지 오랜 듯 했다. 빛바랜 통지서 한 뭉텅이를 게걸스레 입에 문 우편함에서 버려진 세월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 빛바랜 통지서를 버겁게 물고 있는 우체통(왼쪽). 마을 곳곳엔 빈집임을 알리는 구청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오른쪽).

어렵사리 만난 첫 주민은 다 쓴 연탄을 집 밖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기자와 마주치자 한참을 바라보더니 “연탄은행에서 왔어요?”라며 말을 붙였다. 연탄이 없는 빈손을 괜히 민망해하며 기자라고 소개했다. 올해가 마지막 겨울이 될 수도 있단 소식에 취재를 왔다고 전하자, 7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어르신은 기다렸다는 듯 설움을 토해냈다.

“올해가 마지막은 무슨, 그런 얘기는 매년 나와요. 이번엔 재개발될 거란 말만 많고…, 이제 마지막이란 말 안 믿어요.” 주민들은 매번 희망만 줬다가 쏙 들어가 버리는 재개발 소식에 신물이 난 듯 했다. 다른 집을 장만할 여력이 되는 이들은 모두 떠나고 노인들만 남았다고 한탄하는 어르신의 목소리엔 그간 쌓였던 상처가 묻어났다.

“요즘 복지에 돈을 많이 쓴다던데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나 몰라…. 우리한테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재개발한다는 건설사나 서울시나 우리 목소리는 들을 생각도 안합니다. 주변엔 온통 빈집이에요.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갈 곳 없어 남아있는 거지.” 깊은 한숨이 섞여 있는 하소연에 말문이 턱 막혔다. 어쭙잖은 위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건강 조심하시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대화가 끊기자 마을은 다시 적적함에 잠겼다. 눈앞의 오르막길엔 고양이와 비둘기의 발자국만이 쌓인 눈을 걷어내고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해묵은 기침소리가 생존신고마냥 남아있는 주민들이 있음을 알렸다. 마을 정상엔 주인 없는 빈 의자가 텅 빈 마을을 대변하듯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해가 저물자 주민들이 머무는 집에 하나 둘씩 불이 들어왔다. 깜깜한 빈집 사이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집들은 공허한 밤바다를 홀로 빛내는 등대 같았다. 어림잡아 10여 가구에 한 채씩 불이 켜지는 듯 했다. 굴뚝에 연기가 지펴지고 연탄 떼는 냄새도 풍겨왔다.

▲ 마을 정상에 덩그러니 놓인 주인없는 의자는 텅빈 마을을 상징하는 듯 했다.

강제 이주의 아픔 서린 곳

정상을 밟고 크게 돌아 내려오자 마을의 또 다른 입구인 시장 골목을 만났다. 20년 전 쯤엔 이곳이 백사마을의 명동이었다고 한다. 윗동네 아랫동네 할 것 없이 이곳에서 먹을거리도 사고 가구도 고치고 수다도 떨며 시간을 보냈더랬다. 시장의 중심부, 이제는 망치소리가 들리지 않는 목공소엔 백사마을의 터줏대감 장순분 할머니(80)가 난로에 몸을 녹이고 계셨다. 60년대 후반 이곳에 이주해 마을에서만 반세기를 살아오신 할머니를 통해 백사마을의 역사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처음 올 때 모습이 선하지. 완전히 산이었지 뭐. 멕일 게 없으니 삽 들고 나가서 길 닦으라구 노역을 보냈어. 도로를 내면 밀가루 두 포대씩 줘서 그거 먹고 살았지 뭐. 여기 물이 있어 뭐가 있어. 우물 파다가 물 길어 먹구 나무 베어다 불 떼구. 요 뒷산(불암산)엔 호랭이도 있었다니까? 옛날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할머니 가족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은 성북구 석관동이었다. 힘든 형편에 집 짓고 전기 달고선 허투루 버리는 것 하나 없이 야무지게 살림을 꾸렸다. 이제 살만하다 싶을 즈음 청천벽력같이 날아온 강제 퇴거 명령. 가진 것도, 저항할 힘도 없었던 젊은 부부는 피난민처럼 쫓겨 와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 아들은 순진한 눈망울만 껌뻑거렸다. 1968년 11월 22일. 유난히도 시리던 겨울바람이 마음까지 얼려버린 그 날을 할머니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석관동, 이문동, 노량진서 살던 사람들을 다 여기로 집어넣은 거지. 막 추운데. 애들 요만한 게 셋인데. 돈 벌었던 건 석관동서 집 짓는데 다 썼는데 맨몸땡이만 여기다 옮겨 논거야. 추울 때 와서 고생을 많이 했어. 우리 큰 애가 아홉 살 때 왔는데 이제 예순이 다 돼가. 걔 데려다 여기서 국민학교 입학시키고 애들 세 명을 그렇게 키웠지.”

당시 중계동 불암산 자락은 마을이라 부를 수도 없는 곳이었다. 갑자기 맨 몸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계 대책으로 주어진 것은 서른 평 남짓 천막이 전부. 그나마도 부족해 한 천막에 선을 긋고 네 가구가 살았다.

애들 다 키우고 먹고 살만하니 영감은 작년에 가버렸다며 할머니는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주름진 미소 속엔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났다. 노원구 근처에 사는 아들은 늘 빌라에 들어와서 같이 살자고 권하지만 그때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던 50년의 세월, 손수 쌓아올린 손때 묻은 집을 놓고 가기가 어디 그리 쉬울까. 이렇게 마을에 들르는 사람들과 커피 한 잔 대접하는 것이 낙이라는 할머니의 새해 소망은 소박하지만 따뜻했다. “나 같은 늙은이가 새해 소망은 무슨…. 애들(자식들) 건강하고 손주들 잘 되면 그걸로 족하지.”

▲ 마을의 50년 역사를 곁에서 지켜본 산증인, 장순분 할머니.

도시가스는 ‘그림의 떡’…수리도 못한 채 연탄으로 겨울나기

연탄값 인상에 가슴 철렁, “교회 시선 낮은 곳 향했으면”

연탄은 생명줄…기독인들 후원 절실

할머니가 주신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속을 데우고 다시 중계본동종점으로 돌아갔다. 이곳엔 15년 넘게 백사마을 주민들과 함께해 온 서울연탄은행이 자리하고 있다. 아직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은 백사마을은 450세대가 넘는 가구가 아직도 연탄에 의존해 혹독한 겨울을 버틴다.

대부분 노인들만 남아있는 백사마을 주민들의 월 소득은 많아야 30~50만 원 정도. 한 달에 40만 원이 넘게 드는 기름난로는 그림의 떡이다. 그런 주민들에게 연탄은행은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존재다. 연탄은행 대표 허기복 목사는 연탄은행이 시작된 이후론 마을에서 추위에 돌아가시는 어르신이 거의 없어졌다고 전했다.

연탄이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한다면 복음은 죄로 죽은 영혼을 살린다. 연탄은행의 사역 덕분에 시장 골목에 세운 연탄교회에는 남묘호렌게쿄 신자도, 보살도 나온다.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땐 ‘그게 구제지 무슨 목회냐’는 핀잔도 많이 들었다. 그래도 요즘엔 응원과 기도를 보내주는 성도들이 더 많아졌다.

다만 급격히 오르는 연탄 가격이 걱정이다. 원래 장당 700원이던 연탄은 2018년 11월 800원으로 올랐다. 최근 3년으로 따지면 무려 50.8%(300원) 인상이다. 연탄을 구경도 하기 힘든 이들은 겨우 몇 백 원이 뭐 그리 큰 차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겨울에 1,000장 이상의 연탄을 필요로 하는 이곳 주민들은 인상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허 목사의 가장 큰 새해 기도제목은 지금까지처럼 추위에 돌아가시는 어르신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이분들은 추위로부터 지켜줄 제대로 된 집도, 보일러도 없어요. 이분들에게 연탄은 생명줄이나 다름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연탄 후원마저 점점 줄어드는 실정이라 걱정이 크네요.”

그는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는 일에 한국교회가 힘을 쏟아 달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봉사를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다른 사람을 위한 사역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제가 더 하나님을 깊게 만나고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됐습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가 주릴 때에 먹이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됐을 때에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힌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 주십시오. 새해에는 한국교회의 시선이 보다 더 낮은 곳으로 향했으면 좋겠습니다.”

▲ 1960년대 후반 강제이주 당시부터 지금까지 마을의 역사가 벽화에 담겨 있었다.

한현구 기자  hhg@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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