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선배들의 한글사랑, 민족의 정체성 지켜냈다

훈민정음 반포 572돌, 한글수호 신앙인 열전 이인창 기자l승인2018.10.10 10:07:12l수정2018.10.10 10:13l14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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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가 한글 보급의 첨병 역할을 한 것은 익히 알려진 역사이다. 교회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 전국을 다니며 복음과 함께 한글을 전파했던 이름 모를 수많은 권서들이 있었다. 1446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래 수백년간 그저 천한 백성의 글로 천대받던 한글이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자가 된 배경에는 교회가 있었다.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가 충청도 고대도에 상륙해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고, 1876년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가 만주에서 성경의 한글번역을 시작했으며, 1881년 최초 기독교 한글전도문서 ‘예수셩교요령’을 간행하고 이듬해 최초의 한글성경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 등을 간행했다. 

이후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한글이 교육됐고, 특히 전국을 다니면서 한글성경을 판매하며 복음을 전파했던 권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글은 민족의 언어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일제시대 때 한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신앙 선배들이 있었다. 일제가 우리말을 억압할 때 투옥을 감수하면서 겨레의글을 지켜낸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였던 그들이다. 572돌 한글날을 맞아 한글을 그토록 사랑했던 기독교 한글학자들의 삶을 조명해 본다. 

현대 한글의 근간을 만든 외솔 최현배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은 국어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명이다. 구한말 한글학자이자 선구자였던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한글을 배웠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던 외솔은 고향 일신학교를 거쳐 경성 한성고에서 주시경을 만났다.

일본 유학을 마친 후에는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지만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파면됐다. 흥업구락부사건은 기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운동단체 흥업구락부 회원을 검거하며 탄압했던 사건이다. 1941년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했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수형자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외솔은 광복 이후 한글의 학문적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역할을 했다.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한 이래 20년간 학회를 이끌었으며, 그는 우리말 교과서 편찬, 한글전용 촉진정책 추진, 사전편찬, 문법이론서 발간 등 한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외솔은 해방 후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국어교과서 편찬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교과서를 모두 한글로 하고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그는 모든 공문서를 한글로 한다는 ‘한글전용법’을 공포하는 데도 역할을 했다. 외솔은 새문안교회에 출석했다. 

신앙과 한글 열정 컸던 한결 김윤경
한결 김윤경(1894~1969) 선생 역시 최현배와 함께 주시경 문하에서 수학했다. 주시경은 배제학당에서 수학 후 상동교회, 정동교회 등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글전파에 힘썼다. 비록 훗날 대종교로 개종했지만, 그는 교회를 중심으로 수많은 후학들을 길러냈고 그 중 한사람이 김윤경이다. 

김윤경은 상동교회가 운영하던 상동청년학원에서 주시경을 처음 만났고 졸업 후 또다른 기독 한글학자 이윤재를 만나 막역한 사이로 지내며 한글을 가르쳤다.

1919년 3.1운동 때는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만세운동 시위에서 선봉에 나섰다가 투옥된다. 이후 조선어학회 간사로도 활동하다 일제에 의해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당시 경찰에게 맞아 평생 한쪽 귀로 밖에 듣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1942년 한결 선생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됐다. 

특히 한결 선생은 기독교 신앙운동 차원에서도 열심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19년 정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후 기독교청년회의 YMCA 운동에 참여하고 기독교계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한결은 한글역사와 맞춤법, 표준말 등 바른 한글사용을 위한 원칙을 세우는 데 평생을 헌신했다. 

한글 지켰지만 독립 못 본 한뫼 이윤재
한뫼 이윤재 선생(1988~1943)은 김해에서 태어나 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한 이후 기독사학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해 신앙을 갖게 됐다. 주시경 문하에서 학글을 연구한 한뫼는 191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창신학교는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모교이며, 조선어학회장을 지낸 이극로가 공부한 곳이었다. 

한뫼는 일제가 금지한 조선역사를 몰래 가르치면서 우리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마산 예수교청년면려회장, 유년 주일학교장으로 봉사하면서 신학생활 속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는 만세운동을 주도해 1년 6개월 형을 받고 수감되기도 했다. 

감옥을 나온 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가들과 교분을 나눴으며, 단재 신채호 선생의 독립의식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1924년 귀국 후 여러 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발행책임, 진단학회 창립에 관여했다. 1935년부터 감리교신학교에서 강의하고, 1941년에는 기독신문사 주필로 일하면서 한글보급과 우리말 사전편찬에 힘썼다. 하지만 그 역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될 수밖에 없었고, 복역 중 1943년 감옥에서 별세했다. 

한글학자이자 목사였던 백남 강병주 
백남 강병주 선생(1882~1955)은 한글학자이면서 한글목사로 더 자주 불렸던 인물이다. 특히 새문안교회 4대 담임목사를 지낸 강신명 목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25세에 기독교에 입문한 후 강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다. 3.1운동 당시에도 만세시위에 참여했지만 일제에 의해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돼 8개월 형을 살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후 강병주 목사는 풍기교회, 명동제일교회에서 시무하면서, 영주 내명학교와 안동 경안중학교, 동흥학교 등을 세우며 다음세대에게 민족의식을 함양하도록 힘썼다. 조선어학회 유일한 목사회원이었던 그는 교단 내 일체 서류를 한글로 사용하도록 하고, 1934년 제23회 총회 때는 성경과 찬송가를 새 맞춤법에 따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인창 기자  tackle21@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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