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개혁신앙을 지켜낸 ‘하나님의 나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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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개혁신앙을 지켜낸 ‘하나님의 나팔수’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7.11.22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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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종교개혁 500년 ⑪ 존 녹스

존 녹스 (John Knox, 1514~1572)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로 스코틀랜드 내 장로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본디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였지만, 어거스틴의 저술을 접하면서 가톨릭 교리의 모순을 깨닫게 된다. 이후 개신교 지도자로서 순교한 조지 위샤트의 도전을 받아 개신교 신앙의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547년 녹스는 종교개혁의 선봉에 섰다가 프랑스에서 체포돼 19개월 동안 갤리선의 노를 젓는 형벌을 받게 된다. 1549년 초 낙스 일행은 영국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석방됐으며 그 후로 영국에 머물면서 전국 곳곳을 순회하며, 개혁신앙에 대한 설교를 전했다. 
이후 ‘피의 여왕’이라 불리는 메리의 박해로 4년 동안 제네바로 망명하면서 존 칼뱅과 더불어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에 의회를 만들었을 때 교육 개혁과 빈민구제를 결의했으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와 제1권징서를 작성해 장로교회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고, 개혁신앙에 입각한 스코틀랜드를 건설했다.
당대의 뛰어난 설교가로도 이름을 떨친 녹스는 자신을 하나님의 복음의 나팔을 부는 ‘나팔수’라고 칭했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의 나팔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기 위해 일평생을 헌신한 개혁가요 설교가요 목사였다. 

‘복음을 위한 설교자’로 결단 

존 녹스는 1514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인근 해딩턴에서 태어나 성 엔드루스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536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한동안 사제와 법률가로 일한 그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초기 일련의 그의 회심을 초래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됐다.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24세의 젊은 개혁자 패트릭 해밀턴이 공개적으로 화형당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장년이 된 후에는 개혁적 설교가인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의 설교에 깊은 영향을 받아 개신교 사상을 따르게 됐다. 곳곳에서 개혁신앙을 외치고,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을 결집시켰던 위샤트는 1546년 3월 비튼 추기경에 의해 화형당하게 된다. 

▲ 존 녹스의 초상화, 작자 미상.

이후 녹스는 위샤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세인트 앤드류성에 머무르게 됐는데, 이 곳에서 지내는 3개월 동안 복음을 위한 설교자로서의 강력한 부르심을 경험하게 된다. 1547년 6월, 스코틀랜드를 침입한 프랑스 군인들에 의해 총독의 군대가 세인트 앤드류성을 함락시키게 되자 녹스는 120명의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갤리선의 노예로 붙잡히게 된다.

그로부터 19개월 동안 노예함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생활을 하며 고통의 세월을 보냈지만, 이 때 경험한 환란의 시간을 통해 그의 영혼은 더욱 정금같이 단련된다. 이후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풀려난 녹스는 영국에 정착해 설교하면서 영국 전체의 강단 개혁을 위해 영국 교회의 신앙고백서 작성과 예식 법규 제정에 공헌했으며, 영국 청교도들이 영국 국교회 안에 남아 있도록 설득했다. 

하나님의 권위가 군주보다 앞선다

1553년 가톨릭 신앙을 가진 메리 여왕의 등극은 영국에 핍박의 시대를 열게 했다. 메리는 다시 로마가톨릭을 국교의 자리로 회복시켰고, 개신교도들에게 모진 핍박을 가했다. 그로 인해 상당수 개혁인사들이 조국을 등지고 망명을 떠나게 됐으며, 녹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1554년 제네바로 간 녹스는 칼뱅과 만남을 통해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칼뱅의 요청에 따라 제네바의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게 됐다. 이 때, 녹스는 신앙을 위협하는 군주에 맞서 대항할 권리와 의무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특히 상대방이 군주일지라도 자신은 하나님의 교회의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죄악들과 사악함을 꾸짖도록 부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메리 여왕의 개신교 탄압에 대한 강력한 반발은 결코 멈출 수 없음을 피력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19세기까지 영국 미국 등 구미의 정치이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들은 녹스의 혁명적인 종교개혁에 반대 입장을 취했으나 녹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녹스는 1559년 5월 12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스코틀랜드로 귀국해 스털링에서 낙심하고 침체돼 있는 성도들에게 설교를 전하며, 국가의 개혁을 주도하게 된다. 유럽에서 6년 간의 망명생활을 마친 그는 “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시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시옵소서”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기도한다. 여왕 메리는 녹스의 기도를 잉글랜드의 모든 군사보다 더 두려워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유명한 신학책인 ‘예정론’도 이 기간 마무리 됐으며, 1560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출판됐다.
 
‘개혁신앙’에 입각한 스코틀랜드 건설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녹스는 신자들의 예배를 돕는 문서를 만들어주었고, 프로테스탄트 영주들로 하여금 ‘회중의 수호자들’을 구성하게 했다. 녹스는 신앙 증진을 위해 힘썼으며, 온건한 칼뱅주의에 입각한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서’, ‘낙스 전례서’ 등을 작성해 스코틀랜드 개혁을 주도했다. 이 시기 스코틀랜드의 국제 정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프랑스는 영국의 엘리자베스를 몰아내고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포함하는 나라를 세울 꿈을 꾸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후원자인 프랑스가 승리한다면 나라의 독립과 함께 개혁신앙도 박탈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녹스는 영국 왕실을 설득해 스코틀랜드의 개혁파를 돕기 위해 출병하게 된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개혁파들은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개혁 신앙에 입각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1560년 기즈의 메리가 사망하고 난 뒤, 1561년 프랑스 왕태자와 결혼했던 메리 여왕이 돌아오게 되고, 개혁파는 어려운 시절을 맞기도 했으나 녹스는 의연히 대처했다. 1567년 메리 여왕이 실정을 거듭한 끝에 몰락했으며, 녹스의 친구인 모레이의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uart)가 섭정하게 되자 개혁교회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녹스는 에딘버러에 있는 성 자일스 교회(St. Giles’ Cathedral)에서 담임목사로 목회하며 칼빈주의적 종교개혁에 앞장섰다. 

녹스는 계속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강력하게 이끌었으며, 1560년 8월 마침내 스코틀랜드는 교황의 관할권을 폐지했다. 이어 의회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과 ‘교회치리서’와 ‘공동예식서’를 공식 채택함으로써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시작됐다. 역사상 처음으로 성경적 교리에 기초한 장로교회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기 직전까지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하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았던 녹스는 1572년 11월 24일 6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설교’의 표준 제시한 위대한 개혁자

녹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을 토하듯 설교한 사람이었다(fiery preacher of the word of God)’고 익히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개혁사상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그의 설교사역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녹스는 스코틀랜드에서만이 아니라 장로회주의를 따르는 개신교도 내에서 설교를 위한 하나의 표준을 제시한 사람이라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에서의 존 녹스의 입장은 어떤 종교개혁자들 보다 더 단호했다. 성경의 권위와 명료성과 무오성을 확신했으며, 생애 마지막까지 성경이 유일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녹스의 담대한 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설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쇠사슬을 끊고 참된 교회를 세우기를 갈망하고 있지만, 권력의 횡포에 크게 위축돼 있는 개신교도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녹스는 죽기까지 스코틀랜드를 개신교 국가로 바꾸는 위대한 결실을 낳게 한 설교사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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