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의 자유를 위해 왕과 맞서 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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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의 자유를 위해 왕과 맞서 싸우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7.11.2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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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종교개혁 500년 (10) 테오도르 베자

테오도르 베자 (Theodore Beza, 1519~1605)
종교개혁가이자 인문주의자였으며 성서번역자, 교수, 외교관, 시인이기도 했다. 푸아시 회의(Colloque de Poissy)와 종교전쟁 기간 중에는 개혁 진영의 대변인으로 활약했다. 전 유럽을 통틀어 개혁원리에 대하여 견줄 이가 없는 대가였으며 장 칼뱅의 뒤를 이어 제네바 아카데미(Académie de Genève)를 이끌었다.

▲ 테오도르 베자의 초상화, 작자 미상, 1577년

“성인들이 그렇게 남아돌 정도로 많은 공로들을 갖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그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었겠는가? 개혁되지 않은 로마 가톨릭의 신앙체계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모욕이다.”

파리의 인기인에서 제네바의 종교개혁가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에겐 낯선 이름인 테오도르 베자는 스위스 제네바 비스티옹 공원에 새겨진 네 명의 종교개혁가 중 한 명이다. 동상에서 장 칼뱅과 기욤 파렐, 존 낙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베자는 “개혁교회는 계속 개혁돼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상징과도 같은 명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베자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촉발한 이후인 1519년 부르고뉴 공국 베젤레 마을에서 태어났다. 베자의 아버지는 명문가의 후손이자 부유한 지방 행정관이었고 어머니 역시 뛰어난 학식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그는 9살이 되던 해 오를레앙의 그리스어 학자 멜키오르 볼마르의 제자로 들어갔다. 칼뱅의 스승이기도 한 볼마르는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인 학자였다. 베자는 볼마르에게서 그리스도의 의(義)로 인한 칭의 교리를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신이 종교개혁의 선두에 설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종교개혁가로 살기 전 베자는 파리에서 문벌 좋고 재치 있는 학자였으며 뛰어난 시인으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게다가 미남형 얼굴까지 소유해 상류 사람들과 어울렸다. 볼마르에게 헌정된 시집 ‘유베닐리아’로 그는 당대 최고의 라틴어 시인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또 삼촌의 영향력으로 가톨릭교회에서 두 개의 성직을 차지해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1544년에는 클로딘 데노즈라는 여인과 결혼했는데 결혼식은 봉록이 나오는 가톨릭 성직을 유지하기 위해 비밀로 치러졌다.

그때 베자에게 페스트로 보이는 중병이 찾아왔다. 육체적으로 피폐해진 그는 영적인 필요를 느끼게 됐다. 점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알게 된 그는 1548년 가톨릭 성직의 봉록을 버리고 아내 클로딘과 함께 제네바로 향하게 된다.

파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그의 도피는 그만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1549년 파리 고등법원은 이단인 루터의 사상을 받아들여 성직록을 팔았다는 이유로 베자의 체포와 재산 몰수를 공포했다. 1550년에는 화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는 1564년 샤를 9세의 사면령 이후에야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신앙의 자유 위한 적극적 저항 역설
제네바에서 칼뱅과 만난 베자는 클로딘 데노즈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본격적으로 종교개혁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칼뱅과 함께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으로 학교를 위해 헌신했다. 아카데미에서는 훈련 받은 목회자들을 프랑스로 보냈는데 2년 만에 프랑스의 개혁교회가 50개에서 2,000개 이상으로 성장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베자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왕과 맞서 싸운 종교개혁가였다. 베자가 제네바에서 활동하던 1572년 성 바돌로매 축일에 파리에서 개혁파 교인 약 3만 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톨릭교도들이 교회의 종소리와 함께 교회와 집을 습격해 개혁파 위그노들을 학살한 것이다. 대학살 이후 위그노들은 절대왕권에 대항해 맹렬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베자는 제네바로 피난 온 위그노들을 돕는 동시에 이들의 저항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칼뱅이 악한 군주를 백성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보고 무장 항거에 반대한 반면 베자는 신앙을 억압하는 폭정에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1574년 저술한 ‘통치자의 권리’라는 책에서 슈말칼덴 전쟁 당시 카를 5세에 대항해 싸운 마그데부르크 시를 예로 들며 폭군에 대한 백성의 저항권을 옹호했다.
특히 종교 문제와 관련한 폭정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자격 없는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정당하며 필요할 경우 무기를 사용해 퇴위시키는 것이 옳다고 확신했다. 이전에도 그는 ‘이단에 관하여’(1554)라는 책에서 악정을 일삼는 폭군이 나타나면 하위 관직에 있는 관료들이 그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베자의 지지는 프랑스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던 위그노들에게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는 ‘통치자의 권리’ 출간 이후 왕에 맞서 싸우는 자라는 뜻을 가진 ‘모나르코마크(monarchomaque)’라고 불렸다. 

이런 사건들 속에 베자는 프랑스의 개혁파 신자들로부터 가장 탁월한 웅변가요 칼뱅 다음의 저명한 신학자로 인식됐다. 일생 동안 베자는 위그노들과 프로테스탄트 신앙으로 박해받는 이들을 변호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 푸아시 회의, 조제프 니콜라 로베르 플뢰리, 1840년.

칼뱅의 후계자로서의 베자
칼뱅은 그의 동역자였던 베자를 깊이 신뢰했다. 1564년 칼뱅이 죽자 베자는 장례를 주관했으며 칼뱅의 전기를 집필했다. 베자는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 칼뱅의 후계자로 선임됐으며 제네바 목사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은퇴할 때까지 교회와 시정에서 설교와 교육에 헌신했다.

그는 유럽 전역의 종교개혁 지도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1571년에는 라 로셸에서 프랑스 개혁교회 전국 총회를 주재했다. 이 총회에서 칼뱅주의 내 단일 신앙고백이 채택됐다. 베자는 푸아시 회의와 몽벨리아르 회의 등에서 칼뱅의 종교개혁 사상과 예정론을 옹호하는데 적극 나서기도 했다.

베자는 고전어에 능숙한 훌륭한 학자였으며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교사와 주석가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신약성경 본문에 관한 그의 저서는 동시대인들로부터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성서학에 있어서도 중요한 흔적을 남겼는데 1565년 희랍어 신약성서를 출판하고 불가타 본문과 자신의 번역을 함께 실었다.

그는 조직을 이끄는 일에도 재능이 탁월했다. ‘목회자 연합’의 대표로 1580년까지 활동했으며 제네바 시당국이 지속적으로 조문을 구할 정도로 정치적 역량도 있었다.

회심 이후 일생을 제네바 개혁교회를 위해 헌신한 베자는 건강이 악화되자 오랫동안 감당했던 사역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1586년에는 매일 하던 설교를 주일에만 하게 됐고 1598년에는 제네바 아카데미 일에서도 손을 놓고 물러났다.

말년에는 황당한 일도 겪었다. 1597년 프랑수아 드 살레라는 가톨릭 사제가 개종을 목적으로 베자를 방문한 것이다. 프랑수아는 베자를 만나 매년 금화 4천 크라운을 연금으로 주겠다며 가톨릭으로 돌아오라고 회유했다. 4천 크라운은 베자 전 재산의 두 배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베자는 “나를 떠나시오. 나는 너무 늙고 귀가 멀어서 그런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소”라며 물리쳤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베자가 굴복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심지어 제네바의 개혁교인들이 베자와 함께 로마로 가고 있다는 유언비어도 퍼졌다. 이 유언비어에 속은 가톨릭교도들은 그를 기다리다 나타나지 않자 베자가 죽었으며 죽기 전 가톨릭교회와 화해하고 종부성사를 받았다는 말을 퍼뜨렸다. 그러자 베자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풍자시를 지어 여전히 건재함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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