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 연합과 신앙고백 전통 확립한 설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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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 연합과 신앙고백 전통 확립한 설교가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7.11.0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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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종교개혁 (9) - 하인리히 불링거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
탁월한 설교가로 신학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신학적 소양은 풍부했다. 1531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쯔빙글리의 후계자로 선정됐으며 취리히의 종교개혁자이자 설교가로 헌신했다.
불링거는 1546년까지 약 15년 동안 신약성경 주석을 낱권별(요한계시록 제외)로 모두 출판했으며 그의 주석들은 종교개혁을 유지하고 확산하는 일에 큰 힘이 됐다. 칼뱅은 불링거를 부처와 멜란히톤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주석가로 여기면서 그의 주석이 갖는 학문성과 간결성을 높이 평가했다.

▲ 하인리히 불링거의 초상화, 한스 아스퍼, 1550년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해석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 이끈다. 성경은 기독교적인 믿음을 위해 필요한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오직 기독교 교훈의 척도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

쯔빙글리를 이은 젊은 목사
1531년 11월 21일 새벽 네 명의 남자들이 취리히 성문을 급박하게 두들겼다. 그들은 쯔빙글리와 종교개혁의 교훈을 따랐다는 이유로 파문당한 네 명의 목사들이었다. 다행히 네 명의 망명자는 취리히에서 큰 경계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이틀 후 넷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하인리히 불링거는 쯔빙글리가 사역했던 그로스뮌스터(Grossmunster)교회에서 설교하도록 초청받았다. 성도들은 생명의 위협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망명자를 상상했다. 하지만 그 젊은 목사는 쯔빙글리가 살아 돌아왔다고 여길 만큼 담대하고 감명깊은 설교를 선포했다. 다음 달 불링거는 만장일치로 그로스뮌스터교회의 수석 목사이자 취리히교회의 총회 의장에 선출됐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쯔빙글리의 후계자로 선정된 하인리히 불링거는 1504년 스위스 브렘가르텐(Bremgarten)에서 수석사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종교개혁가의 길로 접어든 것은 열다섯의 나이에 수도사가 될 목적으로 쾰른에 간 이후부터다.

쾰른에서 에라스무스 등 인문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받은 불링거의 관심은 자연스레 종교개혁과 마틴 루터에까지 뻗어갔다. 그는 존경받는 교부들의 저서와 루터의 종교개혁, 그리고 신약성경을 함께 탐구하며 종교개혁에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다.

불링거는 오랜 연구 끝에 “하나님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교황주의자들이 미신적이라는 사실과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없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1522년 쾰른을 떠나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인문주의자로서 고향에 돌아온 그는 다음 해인 1523년 카펠 수도원 교사로 초빙받게 된다.

불링거는 카펠 수도원에 머물던 6년 동안 거침없이 개혁을 전개하고 큰 효과를 거둔다. 1525년 처음 성화들이 교회에서 제거됐으며 이후 미사도 금지됐고 1526년에는 처음으로 성찬식이 개혁주의 예전에 따라 시행되기에 이른다. 수도사들은 그들의 특이한 복장을 벗게 됐고 1526년 수도원장과 참사회는 카펠 수도원을 취리히 위원회에 귀속시켰다.

개혁주의교회의 아버지
쯔빙글리와 불링거의 첫 만남은 1523년에 이뤄졌다. 불링거는 쯔빙글리보다 대략 스무 살 아래였지만 둘은 서로를 잘 이해했고 비슷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불링거는 쯔빙글리를 스승이자 동지로 생각했고 쯔빙글리 역시 어린 불링거를 매우 존중했다.

이 때문에 불링거는 젊은 나이부터 쯔빙글리를 따라 여러 논쟁에 참여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21살에 불과했던 1525년 쯔빙글리와 함께 재세례파와의 논쟁에 참가했으며 1528년에는 믿음의 근거, 성경이해, 대속사역 등이 논의됐던 베른너 논쟁(Berner Disputation)에도 참여했다. 그는 이곳에서 마틴 부처, 베르흐톨트 할러, 기옴 파렐 등 주요 개혁주의 인물들을 만나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는 스스로 “신앙에서는 순수하게, 영혼으로는 선명하게, 마음으로는 견고하게, 우리는 진리를 위하여 싸울 것“이라고 다짐하며 종교개혁에 자신의 삶을 불태웠다.

하인리히 불링거는 열정적인 종교개혁가인 동시에 헌신적인 목회자였다. 그는 1528년 6월 21일 고향 브렘가르텐에서 첫 번째 설교를 선포하며 목회를 시작했다. 이후 그의 설교사역은 무려 47년 동안 이어졌다. 그는 평생 7,000번이 넘는 설교를 수행했으며 탁월한 설교자이자 목회자로 존경받았다.

1531년 카펠 전쟁에 의해 취리히로 망명한 이후로는 그로스뮌스터교회에서 헌신했다. 취리히에서 그는 먼저 종교개혁의 안정과 더불어 교회조직을 새롭게 구성하는데 힘썼으며 교회재산을 국가로부터 지키는 것에도 기여했다.

불링거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의 대변인이기도 했다. 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여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교회의 재산과 공적인 재산들이 위급한 이들을 돕는데 사용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Ad fontes)고 외쳤지만 같은 목표아래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적으로 매우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은 거대한 연합체였지만 개혁교회는 몇 가지 신학적 갈등으로 인해 루터주의, 쯔빙글리주의 등 다양한 교파들로 나뉘어있었다.

특히 루터와 쯔빙글리는 성만찬에 있어 첨예한 견해차이를 보였다. 루터는 빵과 포도주 안에 예수님이 실제로 현존한다고 전제했으나 쯔빙글리는 이 구절을 상징적으로 이해하길 원했다. 1529년 루터와 쯔빙글리의 신앙일치를 위해 말부르그(Malburg)에서 종교회의가 열렸지만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이에 불링거는 개혁교회의 일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많은 종교개혁가, 신학자들과 서신교류를 이어갔으며 공동의 신앙고백을 위해 힘썼다. 특히 1547년과 1549년 사이 칼뱅과 왕성한 교류를 통해 성만찬에 대한 입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이 시기 칼뱅은 취리히를 세 번 방문하며 불링거와 견해를 좁혔다. 결국 1549년 제네바와 취리히 사이에 성만찬 일치가 성사됐고 ‘취리히 일치서(Consensus Tigurinus)’가 발표됐다. 여기에 모든 개혁주의 도시들이 서명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회일치를 위한 신념을 모범적으로 드러냈으며 연합된 개혁주의교회를 새롭게 탄생시켰다.

교회에 남긴 마지막 신앙유산
팔츠(Pfalz) 지방의 경건한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Ⅲ)는 개혁교회를 승인하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를 공파하면서 심각한 박해의 위협을 받게됐다. 그러자 그는 1566년 신앙의 동역자였던 스위스 교회에 자신을 변호할 신학적인 논거를 요청했고 노년의 하인리히 불링거는 그에게 ‘우리 믿음의 해설’이라는 신앙고백서를 보냈다.

▲ 스위스 제2신조의 첫 페이지

불링거의 신앙고백서는 곧바로 출판됐다. 이후 베른과 제네바, 샤프하우젠,, 뮬하우젠, 쿠어, 샹 갈렌 등의 도시가 불링거의 신앙고백서에 동의하면서 스위스 연방 도시들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로 채택됐다. 흑사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노목회자의 신앙고백은 이렇게 ‘스위스 제2신조(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로 정립되게 됐다.

스위스 제2신조는 개혁주의교회의 전형적인 신앙 유산이다. 불링거는 신앙고백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문장을 통해 오직 성경에 근거한 믿음을 강조했다.

불링거는 확실한 통찰로 당대 신학적인 문제들을 정리했다. 성경과 설교, 성경 해석의 문제를 다루며 기준을 제시했고 말씀에 근거한 믿음 선행의 문제, 인간의 이해 등을 다뤘다. 매 장마다 개혁 신학의 입장을 변호하고 반대파들의 핵심 오류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다.

특히 불링거는 신앙고백서 분량의 절반을 할애하면서 교회론을 강조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로 하는 대리인(교황)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현존하시며 그 교회의 살아있는 머리이시다”라는 믿음 위에 교회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정리했다.

스위스 제2신조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스위스 종교개혁에 관한 저술이나 칼뱅의 저술도 이 신앙고백서가 출판된 수량과 배포된 영역에는 미치지 못했다. 스위스 제2신조는 개혁교회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다음으로 가장 권위있는 신조로 인정받았으며 오늘날까지 13개 언어로 대략 120판 정도가 출판됐다. 대중성이나 실용성에서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미치지 못하지만 신학적인 면에서는 개혁교회 신조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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