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알리고 사랑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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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알리고 사랑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 승인 2003.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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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전쟁이 끝났다.
누가 이기고 짐도 없이 전쟁은 잠시 휴전에 들어갔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절망이 밀려왔다. 배고파도 먹을 것이 없고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홀로 고향을 떠나 피난살이를 했던 16세 소년에게 더이상 희망은 없었다. 그 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지나던 소년은 찬송과 기도소리를 들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소년은 그곳으로 뛰어갔다.

한국의 전쟁고아를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눠주며 구호사업을 펼치던 한국 월드비전 설립자 밥 피얼스목사의 설교가 한경직목사의 통역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날 소년은 삶에 대한 희망을 다시 찾았다. “살아야겠다.

지금 이 고통이 너무 힘겹더라도 나는 살아야겠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소년은 50년이 지난 지금, 자신과 같은 거리의 아이들을 돌보는 은혜의 사람이 되어 있다.

월드비전 회장 박종삼목사. 그가 국제 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의 수장이 된 것은 이미 50년전 전쟁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려간 한 소년을 향해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었다.

치과의사에서 불우청소년을 돌보던 사회사업가로 그리고 다시 학자로 살아온 박종삼목사의 마지막 길은 월드비전을 통한 국제 구호사업.

그는 자신이 겪어온 과거의 시간은 제대로된 일꾼으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이었을 뿐이라고 웃으며 이야기 한다. “누군가 거리의 고아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겠냐”고 반문하는 박목사는 자신과 같은 어린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다.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 가풍아래 성장한 박종삼목사는 일제시대와 이념의 대립 가운데 핍박받으며 신앙을 지킨 부모님을 보고 자랐다. 신사참배의 시련속에서도 “반드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6.25전쟁이 일어나고 15세의 어린 박종삼은 1.4후퇴 상황에서 혼자 남쪽으로 피난길에 나섰다. 120명의 피난민이 타고 있던 배는 심한 풍랑가운데 서해바다를 가르며 남쪽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공군기가 중공군으로 오인 총격을 퍼부었다. 함께 월남하던 친한 친구가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죽음의 공포속에 항해는 계속됐다. 캄캄한 새벽,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들며 배가 난파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제발 목숨을…”
“제발 목숨을 구해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어린 소년은 죽음앞에서 눈물로 기도했다. 바닷물이 배안으로 밀려오고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섬이다”고 외쳤다. 대이작도로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쳐간 피난민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1951년 1월. 어린 소년의 피난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유엔군의 북진을 기다리며 미군부대 노무자로 생활하던 그에게는 미군부대 군인들과 군목이 곧 부모이자 친구였다. 그들의 보호와 관심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고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53년 휴전이 되자 미군부대 군목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종삼아, 너는 훌륭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주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한 박종삼목사는 독립문 움막에서 생활하면서 시장에 버려진 채소를 주워 끓여먹는 것으로 한끼 배를 불렸다. 죽고싶다는 생각을 해본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되나하는 생각이 밀려들때마다 신앙을 강조하시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를 악물고 공부한 결과 움막생활을 하던 소년은 서울대 치과대학에 합격했고 대학시절 6년동안 해방촌과 한강변의 천막촌 등을 찾아다니며 무료진료를 하는 등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찾아 나섰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의사로 탄탄한 길을 걸어갈것처럼 보였던 박종삼목사에게 또한번의 시련이 찾아온 것은 그가 군에 입대한 뒤였다. 한국부대에서 미군부대 카츄샤를 자원한 박종삼에게 폐결핵진단이 내려졌다.

“하나님 해도해도 너무합니다”
“저에게 이렇게 중한 질병까지 주시면 저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러나 원망은 잠시뿐이었다. 오히려 병원에 있는 동안 신앙없는 청년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데 몰입했다. 6개월간 병원생활을 하고 박종삼목사는 결국 의과사 제대로 군생활을 마감했다.

치과대학을 졸업한 그에게 안정된 생활은 유혹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신학을 공부해 치과선교사가 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광나루 장신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그는 의료봉사를 쉬지 않았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광주기독병원으로부터 함께 일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광주에서 박종삼목사는 쉬는 날이거나 평일 근무가 끝나면 바로 복지시설과 소년원, 형무소 등을 찾아 예배를 인도하고 진료를 실시했다. 66년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까지 받은 그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다짐했다. 그러던 중 소년원생들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게됐다.

“소년원에서 아이들과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해 희망을 주곤했죠. 그런데 출소한 아이들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소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마디로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우리를 받아 주는 사람들은 조직에 있는 형들뿐이다. 죄짓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말이죠. 그 아이들이 다시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낼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박종삼목사는 그때부터 광주에 무의탁 비행청소년 보호시설인 ‘보이스 타운’ 건립에 매진했다. 병원 근처에 전세집을 얻어 소년원 출소생들과 함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미국에 있는 목사님의 도움으로 프린스톤 신학대학에서 유학하면서 보이스타운 건립기금을 모금해 시설을 완공했다.

70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박목사는 다시 보이스타운에서 특수목회를 펼쳤다. 그러나 2년 뒤 미국 남가주대학으로 본격적인 사회사업 공부를 위해 다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는 박목사에게 국무부 통역관리직을 요청했다.

그에게 다가온 두번째 유혹이었다. 그는 안정된 치과의사의 길을 포기했고 이어 미국에서의 보장된 미래를 사양했다. 그에겐 광주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종삼목사는 월드비전에 오기까지 많은 체험을 했다. 보이스타운에서 직접 아이들과 부딪치며 생활했고 숭실대에서 20여년간 사회사업을 가르쳤다. 또 미공군부대의 주말목회 사역자로 선교와 교육, 목회 3가지 길을 걸어왔다.

이제 월드비전에서 그는 1년 남짓 사역을 감당했다. 자신의 고향인 북한땅도 밟아 보았고 아프리카와 같은 기근지역도 직접 방문했다. 한국에서는 고아원과 도시락사업장 등 시설을 돌아보며 빈곤층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격려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자신이 겪었던 가난과 질병, 전쟁이라는 고통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멈춰 버렸더군요.”
“북한에 가보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50년전 그대로였죠. 사람들이 왜 북한을 돕느냐고 반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로 내 형제들이 배고프게 할 수는 없죠. 고통을 나눠갖는 것, 고통받는 자를 돌보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참 진리였습니다.”

월드비전에서 해야할 일은 그가 평생을 해온 일보다 훨씬 많다. 특히 아프리카지역의 가난문제는 상상을 초월한다. 90%에 가까운 인구가 하루에 1달러도 안되는 돈으로 살고 있고 자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루 3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고칠 수 있는 질병으로 죽고있다.

“세계 빈곤국가들은 사람이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 하는 문제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절에 잘 사는 나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우리의 여유로움을 다른 지역 빈곤층 주민들을 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월드비전이 하는 이 사업에는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십니다. 결국 한국교회가 함께 해결해 나갈 과제인 것이죠.”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차가운 겨울바람속에서 나눔의 의미가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고통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거리의 소년’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사랑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살아있는 동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가능한 많이 찾아 내는 것이 초로의 목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며 박목사는 환히 웃었다.

자신의 설교가 한 영혼을 이렇게 완전히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을 ‘밥 피얼스목사’는 알고 있었을까. 그가 시작한 월드비전은 이제 그의 설교를 듣고 삶의 희망을 얻은 ‘거리의 소년’에 의해 새롭게 꿈틀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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