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효성의 문화칼럼]더치 페이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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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효성의 문화칼럼]더치 페이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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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7.1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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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효성의 성지를 찾아서(45)

얼마 전 네덜란드 미술 작가들이 한국에 왔다. 현대 미술 작가인 이들은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는 작가들로 국내 미술관에 초대되어 전시차 온 것이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전시기간 몇 차례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역시 이들은 식사를 마치면 당연한듯 각자 자기가 먹은 식사비를 나누어 내는 것이다. 손님이라 생각해서 한번은 필자가 부담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무리하지 않게 무엇이나 함께 할 수 있어 부담스럽지 않아 좋다.

이런 식으로 계산 하는 것을 우리는 ‘더치 페이’라고 한다. 이 말은 네덜란드에서 나온 말인데 네덜란드인을 가리켜 Dutch man이라고 하며 네덜란드 인들이 한턱 낼 때 사용하는 Dutch treat라는 말을 영국 사람들이 Pay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더치 페이라는 말은 이제 ‘각자내기’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으며 외국 경우 대부분 이러한 셈법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둘 이상 모여 식사를 할 때면 누군가 한 사람이 내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정이 많은 민족이라 있든 없든 상관없이 서로 먼저 내려고 한다. 이런 문화 속에 체면도 한 몫 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외국인의 눈에는 독특한 한국적 풍경으로 보인다. 이들은 각자 내지 않으면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빚지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를 보면서 필자는 기독교의 구원의 원리와 비교해 보았다. 구원의 문제는 개인의 신앙에 따라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문제이고 단체로 입장권을 끊어 천국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각자 믿음대로 해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천국은 더치페이인가? 그런데 한편 근원적인 문제에서 한국적 스타일이 등장한다. 우리가 죄인 이었을 때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구원함을 받았다. 내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그분이 대신 해결해 주신 것이다. 내 대신 밥값을 내주신 그 분께 감사한다. 하온데 그 밥값은 다름 아닌 생명을 바쳐야 해결되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 그 사랑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장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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