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대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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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대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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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2.08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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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호 목사 / 춘천동부교회

유명한 과학자 11명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무엇인가?” 질문을 받은 과학자들의 대답은 첫 번째가 인쇄기계, 두 번째가 전기모터, 그 다음으로 비행기, 다음으로는 컴퓨터였습니다. 이런 대다수의 답변과 달리 작가이며 평론가인 더글라스 러쉬코프(Douglas Rushkoff)의 대답은 뜻밖에도 ‘지우개’였습니다.

“지우개, 컴퓨터의 ‘delete’ 키, 화이트(수정액), 헌법 수정조항” 이런 말들을 보면, 그의 대답도 참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우개가 없었더라면 이 세상은 우리의 실수와 그 흔적들로 가득 차서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넣을 틈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우개가 과연 모든 것을 지울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분이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막상 암 판정을 받고 나니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한 것, 또 이웃들과 잘 지내지 못한 것이 참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단순히 글씨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나간 과거의 시간들을 결코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강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력으로 보면 이 대강절은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새해가 시작된다고 해서 지난 일들이 마치 흰색 도화지처럼 송두리째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지울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새해를 살아가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그 해답을 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700여 년 전 이사야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예언한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강대국들의 속국이 되어 앗수르, 바벨론, 또 페르시아의 속박 속에서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모든 면에서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고, 밀려오는 이방문화에 무기력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삶의 자리가 변해감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자리도 점점 형식화 되고 변질되어 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런 저런 이유로 자기들의 역사를 지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그라운드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이사야 9:1) 지우지 않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요? “큰 빛”을 비춥니다. 한 아기의 모습으로,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칩니다. 이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지우고 싶어하는 흑암에, 우리 삶의 그늘진 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빛을 비추시면 “영화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도무지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흑암을, 큰 빛으로 덮으시고 영화롭게 바꾸시겠다는 이 희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기다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이사야의 대강절은 바로 그 빛을 향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직장을 은퇴하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자 기도하던 교우 한 분이 계십니다. 기도하던 중에 중국에서 북한 이탈 주민을 위한 사역에 헌신하기로 합니다. 중국에 넘어온 북한 주민은 남자들은 대부분 죽이고 여자들은 농촌에다 판다고 합니다. 10대 여자들이 나이 많은 중국 사람들과 결혼을 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 노출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떤 혜택도 못 받고 숨어 지낸다고 합니다. 이런 북한 이탈 주민을 돕기 위해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고, 1개월 혹은 몇 개월 마다 늘 거처를 옮겨야 합니다. 한마디로 불안정하고 위험한 사역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위하여 중국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언제까지 하시려고 합니까? 중국 땅에서 추방당할 때까지 감당하시겠다고 합니다. 왜 이분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흑암의 자리에 있는 백성들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큰 빛을 소망하며 희망을 선포한 것처럼 말입니다. 시간은 여전히 흘러갑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대강절이 왔습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희망의 기다림, 이사야의 대강절을 함께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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