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태화의 문화칼럼] 은혜에 싸구려는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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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의 문화칼럼] 은혜에 싸구려는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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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3.17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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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의 종횡무진 문화읽기 (25)

이론과 실천의 상관관계(Theory & Praxis)는 인간 역사에서 뜨거운 주제였다. 이론이 최선이면 그 이론의 실행, 즉 실천의 결과도 만족스러워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론은 선(善)한데 실천은 악(惡)하다면 명제는 맞지 않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이상적 사회는 완벽한데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왜 분쟁과 혼란이 계속되는 것일까. 학교라는 기관은 청소년들의 꿈의 현장으로 지극히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데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이론이 잘못되어서일까, 아니면 그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실천이 잘못되어서일까.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론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데, 아니 완벽한데 왜 실제는 삐걱거리고 흔들리는가.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 고뇌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도 해당된다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와 물을 내어쏟으시고 몸이 찢기시기까지 세우신 교회가 어떻게 이 땅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받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말씀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아본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가르치신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 2:29). 현대의 어떤 교회들이 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는 치명적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다. 할례를 외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에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신앙의 본질은 먼저 마음에 있다. 할례의 의미는 마음에 우선한다. 그런데 신앙인들이 마음보다는 형식적인 데에 더 치중했던 것이다. 믿음의 선민 이스라엘이 넘어지고, 구원의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도 거기에 있었다. 가시적 신앙의 표식을 더 신경썼던 결과였다. 거룩함과 구별됨의 시작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망각 또는 왜곡했던 것이다. 이런 오류는 현대교회에도 적용된다.

본회퍼 목사는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이 문제를 ‘값싼 은혜’로 표현했다. 이 용어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십자가 사건을 값싸게 여긴다는 신앙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 점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성도들, 교회들이 흔들리고 비난의 대상이 되어가는 것은 은혜를 값싸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경우든지 값싸게 여김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은혜가 무조건 주어지고, 믿음으로 주어지다보니 현대 교인들이 그 고귀한 은혜를 스스로 쉽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것이든 값싸게 얻는 것은 없다. 모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최고의 감사와 경외하심으로 받아야 한다. 십자가의 은혜는 어떤 경우든지 값싸게 여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생각한다면 일부 교회와 성도들이 잃어버린 진정한 명예를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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