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태화의 문화칼럼] 나무로 신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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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의 문화칼럼] 나무로 신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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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1.1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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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의 종횡무진 문화읽기 (21)

가을 만산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도로는 몸살을 앓는다. 길이 막히고 막혀도 어떻게해서든 형형색색 단풍을 만끽하려는 열정을 막을 수 없다. 단풍놀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놀이 이상의 축제다. 자연이 벌이는 신비한 잔치를 놓칠 수 없어 산이고 들이고 떠나는 모습, 사실 그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면 사람이 가는 게 아니라 단풍이 부르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단풍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거시는 그 어떤 의미심장한 대화로의 초청이다. 하나님께서 과연 단풍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단풍은 종말을 표상한다. 일반적으로 계절을 은유(Metaphor)로 볼 때, 봄은 생명, 여름은 성숙, 가을은 노쇠, 겨울은 죽음을 비유한다. 여러 문화권에서 계절은 그렇게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면 겨울은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 마녀가 지배하는 동토의 세계를 상징했고, 영화 ‘겨울왕국’에서는 엘사의 초능력이 만들어낸 불안과 공포에 갇힌 세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가을의 단풍은….

단풍은 이제 곧 전환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을 알리는 전령이다. 앞으로 다가올 세계는 지금까지 지내온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암시한다. 땅이 얼어붙고 세상이 추위에 벌벌 떨며 생명이 소진해간다. 이 모습은 심판의 한 장면이다. 단풍은 그리하여 이제 곧 심판이 시작된다는 심판주의 나팔소리 같다. 사람들이 단풍을 보러 바삐 달려가고, 그 앞에서 환호하는 장면은 사실 단풍의 부름에 응하여 자연 앞에 서는 행위이다.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준엄한 선언문 앞에 나가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은 단풍을 통해 인생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다. 이 화려함 뒤에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심판이 시작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허리를 동이고 그 앞에 나서거라.

단풍이 지나면 휘황찬란한 잔치는 막을 내린다. 무대의 조명은 꺼지고 막은 침묵 속에 가라앉는다. 나무들은 모든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을 하늘로 내뻗는다. 벌거벗어야 한다. 심판 앞에 어느 누구도 치렁치렁 옷을 걸치고 자신을 숨길 수는 없다.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히 4:13) 드러나게 되어 있는 심판 앞의 모습처럼 나무들은 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벌거벗은 채 가녀린 손을 뻗어 기도한다. 심판의 주님, 공의와 사랑으로 저희를 굽어살펴주소서.

주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빌 2:7)가 되신 것처럼 나무들도 그렇게 자신을 비운다. 나무들이 물을 머금고 겨울을 살아낼 수는 없다. 만약 물을 버리지 못한다면 겨울 맹추위에 나무들은 얼어터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다. 그러기에 물을 쏟아내야한다. 심판대 앞에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나갈 수 없듯 그렇게 자신을 비워내야 한다. 가을에서 겨울로 전환되는 이 계절에 나무는 진지하게 신학을 한다. 신학을 살아내고 있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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