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태화의 문화칼럼] ‘명량’이 명령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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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의 문화칼럼] ‘명량’이 명령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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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9.24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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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의 종횡무진 문화읽기 (20)

한국 영화계에 또다시 신기록을 세우는 일이 벌어졌다. 영화 ‘명량’(김한민 감독)이 1,700만 관객수를 다시 갱신하며 2천만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한국 영화사에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몇 있지만 감히 2천만 관객을 운운하는 영화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명량’이 당당히 도전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질문은 어렵지 않게 답을 알려준다. 충무공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해서다. 충무공이라는 소재는 이른바 애국, 민족주의 마케팅에서 일순위로 손꼽히는 단골 메뉴다. 졸작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무난히 투자(?)를 회수할 수 있는 흥행 보장 테마다. 게다가 이번에는 시의와 맞물려 ‘대박’이라는 사고를 쳤다. 여기서 정말 묻지 않을 수 없다. ‘명량’, 도대체 어떤 이유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가!

한 영화가 갖고 있는 흥행요소는 복합적이다. ‘명량’에서도 다양한 매력포인트를 집어낼 수 있다. 꼭 한 가지만 꼬집는다면 관객과의 소통면이다. 충무공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부활하고 있다. 영원한 국민 멘토로서.

대한민국 국민은 어느 때부터인지 정치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주권과 정권의 근원인 국민은 정작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왔다. 정치인들이 권력을 앞에 두고 벌이는 이전투구, 현안에 대한 소인배적 합종연횡, 온갖 이권과 먹잇감을 둘러싼 여야 정치인들의 이합집산 등 그러한 현상에서 국민이 느끼는 배신감, 허탈감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급기야 정치권은 ‘딴나라’의 ‘딴따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통부재, 소외충만, 국민과 정치의 별거시대는 국민 행복지수를 철저하게 유린하였다.

여기에 충무공은 의연히 일어나 호령한다. 정치인의 명패를 걸고 누가 감히 소인배처럼 자기만 살려고 국민을 저버린단 말인가.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기어코 살리라.”

충무공은 백척간두에 서 있다. 적군은 300척이 넘는 배로 위협하는데, 아군조차 뒤로 꽁무니를 빼는 이런 참담한 비극 앞에서 충무공은 호령한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공포에 질린 군인과 백성들을 독려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최전선으로 돌진한다.

관객들은 여기서 심장이 멎는 듯하다. 우리 시대에, 어떤 정치인이, 어떤 진정한 영웅이 나서서 저렇게 백성을 격려하며 적진을 향해 돌진한단 말인가. 죽음을 개의치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 저렇게 몸 던지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바보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 호(號)의 이 총체적 난국을 어찌 돌파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인들이 어떻게 해야 제자리로 돌아오고, 침몰해가는 배를 어찌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제발, 제발, 침몰하지 않게 해달라고, 위기를 당당하게 극복하게 해 달라고 말없는 애원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관객들은, 아니 국민들은 ‘명량’에서 그렇게 울부짖었고, 명량은 그 절규를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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