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소중함, 뼈에 새기고 기도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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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소중함, 뼈에 새기고 기도해야죠”
  • 공종은 기자
  • 승인 2014.06.17 07: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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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칼빈신학교 학장 강문석 목사

# 나는 이렇게 6.25를 겪었다

강문석 목사(성남 영도교회 원로. 전 칼빈신학교 학장). 6.25 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의 중심에 있었다.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들었고, 포탄은 비 오듯이 쏟아졌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총알 소리는 이제 자장가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밀고 밀리기를 수십 차례. 사단 본부는 예하 부대에 “특공대를 파견해 적군을 생포하든지, 문서를 탈취하든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적의 정보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즉시 특공대가 꾸려졌다.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하지만 모두 실패였다. 네 번째, 당시 강 목사가 맡은 중대가 지명됐다. 특공대는 모두 1백 명. 하지만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명령이라 해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 목사가 해당 연대에서 가장 고참이었다. ‘마지막 특공대’이기를 바라는 상부의 마음이 담긴 명령이었다.

눈 앞이 캄캄했다. 화문산, 강원도 884고지, 중부전선 진부령, 철의 삼각지대의 조경능선 전투 등 치열했던 전투에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았지만, ‘이제 내일이면 마지막을 장식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막히고 눈앞이 하얘졌다.

그 때 다가온 사람이 군목이었다. “중대장님, 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죽음이란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육신은 죽으나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강 목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선에서 싸우기를 2년여. 그동안 3번의 부상과 3번의 포로 신세에서의 탈출이 있었지만, 죽음을 앞둔 강 목사에게 하나님은 없었다.

#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다

새벽 3시. 사단장과 연대장의 환송을 받으며 적진을 향해 출발했다. 새벽 4시 30분에 210mm 대포가 적진을 향해 날아가 터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군단 폭격기가 폭탄을 더 퍼부었다. 이제 특공대가 올라갈 차례. 8부 능선까지 올라가자 통신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강 목사를 찾았다. 23살의 앳된 소대장이 전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전쟁은 이런 것이었다. 꽃피워보지 못한 젊은 청년의 목숨을 너무도 쉽게 앗아가 버렸다. 그래도 다시 돌격이었다. 총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 진지 사격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정신을 잃었다.

뺨을 때리는 아픔을 느끼며 깨어난 순간, 총부리를 겨눈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북한군들이 보였다. 나와 함께 살아남은 부하들 13명은 모두 무장 해제된 상태였다. 말 그대로 포로가 된 것이었다. 북한군 소위가 달려오더니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든 걸 체념하고 눈을 감는 순간, “노래를 하나 부르게 해주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기철 이병. 강 목사의 부하 병사였다. 마지막 소원임을 아는 북한군 소위도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해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찬송은 계속 이어졌다. 강 목사의 어머니가 고생하실 때나 친척들이 방해할 때 교회에 가서 늘 부르시던 찬송이었다. 목이 메어왔다. 이것도 잠시. “거총!” 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탕! 타타타탕!!!”

하지만 강 목사는 쓰러지지 않았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오히려 앞에 있던 북한군들이 모두 죽어있었다.
북한군 소위가 강 목사에게 달려왔다. “중대장 동무, 나를 남한으로 데려가 주시오!” ‘목사가 되라!’던 아버지의 말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았던 북한군 소위를 이 찬송이 깨웠고, 강 목사와 13명의 전우를 살린 것이다.

강 목사의 군 생활은 기적과도 같았다. 그 추운 백석산 520 고지, 동상에 걸려 다리를 절단하는 동료가 적지 않았지만 강 목사는 그 흔하게 걸리던 동상 한 번 걸리지 않고 군생활을 했다. 전쟁 중에 머리와 옆구리, 대퇴부에 총알을 맞기도 했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대구 육군병원에서 큰 수술도 받았지만 그래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 뼈만 남은 손이라도 만져 봤으면

강 목사의 나이 90세. 6월만 되면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 전장(戰場)을 함께 누비던 전우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 때문이다. 뼈만 남은 손이라도 잡고 싶은 전우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의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 그저 고맙기만 하다. 더디고 어렵지만 마지막 한 사람까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도 잊지 않고 계속 한다.

“아직까지 시신을 찾지 못하는 수많은 전우들이 우리나라 곳곳에 묻혀 있고, 어느 곳에 묻혀 있는지조차 모르는 시신들이 수도 없이 많아요. 미국에서는 한 명의 자국 포로 생환을 위해 적대국의 포로 다섯 명을 내주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국가가 할 일이에요. 국민들을 위한 이런 국가적 사랑과 결단이 있어야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게 됩니다.”

원로 목사의 눈에 불안한 빛이 스쳐간다. 나라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마음 한 구석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어르신의 모습 그대로다. 이야기 중간중간 말을 끊는 노 목사의 눈빛에 많은 회한과 걱정이 담긴다. 그렇지만 격정적인 말도 쏟아냈다.

“6.25 참전 군인들 중에서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이 50만 명이 채 안 될 겁니다. 그마저도 모두 80세가 넘은 노인들입니다. 나를 포함한 이들 대부분이 아마 10년 이내에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될텐데, 그러면 우리나라에는 전쟁을 모르는,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전후 세대들만 남게 됩니다. 군대 또한 마찬가지죠.”

“….”

“많은 나라들이 해외 전투지에 군인을 파병하는 것은 실전 경험을 기르기 위한 결정입니다. 전투를 할 수 있는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지요. 전투 경험이 없으면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나라도 파병을 하기는 하지만 평화유지군입니다. 우리도 이런 문제에 철저히 대비해야 합니다. 철저한 대비와 훈련만이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무방비 상태에서 6.25를 맨몸으로 겪어야 했던 노병(老兵),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적의 총탄 흔적을 고스란히 몸에 지닌 채 살아가는 한 원로 목사의 회한이 담긴 말이다.

강 목사는 90세의 나이에 개척을 했다. 영등포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자리잡은 ‘원목교회’. 현역에서 은퇴한 원로목사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다. 자신이 개척해서 성장시킨 2천 명이 넘게 모이는 교회가 성남에 있지만, 강 목사는 원목교회에서의 목회가 더 즐겁단다.

“이 곳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기도하는 원로목사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요, 우리 한국 교회가 나라를 더 사랑하고 더 꼭 껴안아야 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나라의 소중함을 돌기둥에 기록했듯이, 우리 또한 나라의 소중함을 뼈에 새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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