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아 너는 잔인하게 지나갔지만, 복음은 이 땅에서 더욱 굳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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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아 너는 잔인하게 지나갔지만, 복음은 이 땅에서 더욱 굳세어라”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4.06.16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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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 복길 마을의 민간인 86인의 학살 재조명

이 나라의 자연은 무성한데 한 민족의 인심은 풍성한데
6월아 너는 어이 악마가 되어 86명의 생명을
이 강토에 피로 물들이고 어디로 갔느냐
오리라 님들 목숨보다 더 몇 만 배의 진한 값으로 이 땅에 찾아오리라
보시옵소서 님들이여 공산당은 멸망하리라
우리들은 알리라 가신 님들의 뜻을
가시옵소서 뒤돌아보지 말고 한일랑 뿌리소서 통일의 길목
님들이여 조국 앞에 한 줌에 흙으로 이름 모르는 겨레 앞에
한 방울의 기름으로 영원히 남으리라 (김정삼 시인의 추모시 ‘유월아’)

봄의 기운을 고즈넉이 흘려보내고 어느덧 유월의 중반부에 도달했다. 한 해의 중반이 흘러갔다는 아쉬움에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되는 유월, 한 해의 길목에서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남도의 한 마을을 찾았다.

6·25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당시에는 한 날에 이웃 주민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찌르고 죽이는 참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잔인한 역사가 할퀴고 간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복음은 이를 가슴에 묻게 만들었고 마침내 치유의 결실을 맺게 했다.

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국도를 따라 12km. 그 다음 굽이굽이 펼쳐진 시골길을 따라 흙냄새가 풀풀 나는 강토를 따라 가다보면 서남해안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농어촌마을에 당도한다. 무안군 청계면 복길리. 점복(卜)에 길할길(吉)자를 사용하는 복길은 이름만큼이나 복이 많은 마을이다. 마을이 부유하거나 많이 누릴 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마을 주민의 90%가 교회를 다닐 정도로 오랜 기독교 역사를 자랑하는 말 그대로 복이 길한 마을이다.

▲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마을 중앙부에 위치한 십자가가 한 눈에 띈다.

으레 농촌의 풍경이 그러하듯 농번기를 맞은 마을에는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평온함이 감돈다. 이제 막 밭일을 끝내고 온 듯한 아낙네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세상 노래나 여느 유행가가 아니다. 태양 볕 아래 고된 일을 마치며 하루 일과에 대한 감사함을 담은 찬양 소리다. 반가움에 다니는 교회를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언덕 위를 가리킨다. 손가락 끝이 닿는 곳에는 마을 중앙에 우뚝 솟은 십자가가 한 눈에 들어온다.

#90%의 복음화 마을

일단 복길 마을에 들어서면 복길교회를 찾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을의 한 중앙에 위치한 십자가를 따라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얼마 되지 않아 선창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복길교회를 마주하게 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복길교회는 백여 년의 깊은 역사를 바탕으로 남도의 신앙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마을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십자가가 마치 복길 마을에 흐르는 신앙의 젖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느낌이다.

교회 앞마당 한 켠에는 6·25희생자 86인의 교인들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기독교 순교자와 희생자들이 많이 배출됐지만 총 1백 30세대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86명의 희생자를 낸 마을은 흔치 않다. 한 가구만 건너도 희생자 가족이 있을 정도로 뼈아픈 상처를 간직한 마을이지만 복음의 힘은 이 땅을 더욱 굳세게 만들었다.

▲ 백 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복길교회.

기록에 의하면 목포와 근접하게 자리하고 있는 복길교회는 1910년대 후반에 가정교회로 시작돼 전남지방에서 최초로 설립된 목포양동교회에서 파송된 이남규 목사에 의해 1921년 설립됐다. 정부 수립 후 초대 전남도지사를 지낸 이남규 목사와 선교사를 통해 전해진 복음을 마을 주민들은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며 순식간에 80% 이상이 교인이 됐다.

대부분이 바다에 터전을 두고 생업을 이어가는 농어촌마을에 무속신앙이 팽배하듯 복길교회가 설립되기 전까지 복길 마을도 각종 무속 신앙이 만연했다. 한국 전쟁 전까지는 마을에 당골(무당)이 있었으며, 배를 건조하거나 조업을 나갈 때 시루떡을 해놓고 풍어제를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마을에 각종 미신을 몰아내고 복음화 성지(聖地)를 이루어 낸 것은 실로 복음의 능력이 만들어낸 기적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적인 배경은 무안군 일대에서 복길 마을을 예수쟁이 마을로 인식하게 되고 참혹한 학살이 일어나게 된 중요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참혹했던 그 날의 기억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과 고난은 떼려야 뗄 수 없듯 복길 마을의 역사도 고난이라는 머릿돌 위에 세워졌다.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인민군이 퇴각하자 그 기쁨을 억누르기 힘들었던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 회관에 모여 태극기를 걸며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좌익 세력과 함께 다시 복길로 들어온 인민군은 마을 사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바닷가에 한데 모아놓고 죽이는 충격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주민들의 냉대를 받았던 무당이나 머슴 등 4~5명이 복길을 급습한 30여명의 인민군과 손을 잡고 마을 주민들을 선창가로 불러냈다.

그날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이상윤 집사(80)는 “평소 마을 주민에게 앙심을 풀었던 이들이 주민들을 무작위로 끌어왔다”면서 “죽창, 삼발이를 들고 수십 명이 동네를 둘러싸고 갯가로 불러냈다”며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묘사했다. 그 사건으로 이 집사의 아버지와 어린 동생이 목숨을 잃었다. 그의 어머니도 그 충격으로 인해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뒀다.

이 집사는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목격한 당시의 처참한 풍경은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며 “전쟁의 아픔이 결국 이러한 민족적인 비극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故 정대성 장로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의 상황은 실로 끔찍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때리고 수장시켜 바다는 온통 핏빛으로 변했다. 헤엄을 치거나 물 위로 떠오르는 사람들을 총대로 머리를 때려죽이거나 죽창으로 배를 찔러 창자가 나오고 어떤 사람은 죽창에 항문에서 입까지 산적처럼 꿰어져 죽었다. 이는 실로 천인공노할만한 풍경이었다.

▲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복길 바닷가 선창가에 배들이 있다.

개중에는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이들도 있었다. 끌려온 이들 중에서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데 평소 인심이 후했던 덕에 밥을 지으라는 명목으로 풀어줬다고 한다. 그 어머니가 그 옆에 있던 20살짜리 딸에게 아기를 맡겨 이 둘도 기적처럼 살아나게 됐다.

나중 딸은 해남제일교회 조몽룡 원로목사의 사모가 됐으며, 울던 아기는 현재 복길교회의 김재철 장로(65)이다. 이밖에 도망쳐 바다에 떠다니는 검불이나 수초 밑에서 숨어 수 시간을 헤엄치다 살아난 이들도 있었다. 잔혹한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은 9·28수복일. 북한 공산군을 무찌르고 석 달 만에 수도 서울을 되찾은 날이다.

서울 땅이 수복 되자 복길리 청년들은 자치대를 조직해서 산으로 숨어든 잔비를 소탕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들을 잡아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눈에다 불을 키고 달려들었지만 당시 청년 자치대 대장이었던 故 정대성 장로는 원수를 악(惡)으로 갚지 않았다.

자신의 누이와 부인이 죽임을 당했지만 이들을 용서하고 많게는 40여명의 생명을 살려주면서, 같은 비극을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다. 자기 가족을 죽인 자를 용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복길 마을의 추모비가 더욱 값지고 빛나는 것은 희생 뒤에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짙은 고난으로 더욱 견고해진 ‘신앙마을’

학살의 원인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으나 복길 마을 주민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라는 점에서 신앙적인 부분의 원인을 배제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복길교회는 복길 마을의 비극적 희생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현재도 그 상처를 치유하는 중심에 서있다. 그날, 처참히 죽어간 86인의 생명을 추모하는 비석이 교회 안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복길교회 목사로 1987년 추모비의 건립을 추진한 정성조 목사(현 부산명장중앙교회)는 “마을 주민과 교인들이 손수 힘을 모아 비석을 건립했다”며 “자칫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일을 기억하기 위해 유족회를 구성하고 추모식을 거행했다”고 밝혔다.

복길교회의 시련은 이로써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 때는 구원파가 들어와 교인들을 다 흩어놓아 교인이 열 명 남짓 남았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수난은 복길 마을을 더욱 견고한 신앙 마을로 만들었으며 지금은 마을 전체 120여 가구 중 90%에 가까운 수가 기독교인이 됐다.

▲ 복길교회 안마당에 비치된 6.25희생자 86인의 추모비와 황인갑 담임목사.

허나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전쟁 당시 복길 주민들이 학살된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03년 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학술심포지움 자료에 따르면, 86인 외에도 63명의 희생자 명단(무명 포함)을 포함해 149명이 피살당한 것으로 확인돼 정확한 조사와 진상규명이 요청된다.

▲ 1960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당회록에는 복길교회의 희생자를 순교자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순교로 보고 순교자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복길교회 황인갑 담임목사는 1960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복길교회 당회록에 당시의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기록해 놓은 명단을 발견했다.

황 목사는 “당시 희생된 이들 중 대부분이 교인이었기에 충분히 순교자로 볼 가능성이 있다”며 “초대 도지사였던 이남규 목사가 교회를 설립했다는 점에서 공산군의 표적이 됐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또한 그는 “많은 시간이 흘러 자꾸만 기억이 희미해지고 남아있는 희생자의 후손도 많지 않다”며 “이들이 순교자로 지정받을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더욱 검토해 해안가를 중심으로 순교기념관을 건립하는 노력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현재 정부에서 한국전쟁 당시 복길 주민들의 희생 사실을 인정해 정식 추모비를 마을에 건립해 놓은 상태다. 역사적 비극은 한순간에 복길 마을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복음은 상처를 비집고 더욱 굳세게 들어섰다. 더욱이 복음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골육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는 일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제는 86인의 추모비 뒤의 아름다운 비화(秘話)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도록 아로새기는 일이 복길 마을의 과제로 남겨졌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마을 돌담 사이를 비집고 핀 꽃 야생화의 질긴 생명력이 복길마을에 핀 복음의 역사와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 마을 한켠에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건립한 희생자 86인 추모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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