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 "맞습니다, 맞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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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맞습니다, 맞고요∼"
  • 승인 2003.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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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분들과 가난한 자 그리고 소외된 자 등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싶어요.”

최근 개그콘서트에서 노무현대통령의 성대모사와 함께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유행어로 방송과 언론은 물론 국민적 붐을 일으켜 각종 출연 및 인터뷰 요청에 몸살을 앓을 지경인 ‘노통장’ 김상태성도(31·여의도순복음교회).

오늘의 잘나가는 노통장이 있기 까지는 깊은 서러움과 철저한 외로움의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그때 마다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인내’했던 것이 오늘의 자리로 인도한 것이다.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 유치원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한 김성도는 이 말씀을 붙들고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서 때로는 분장실에서 눈물의 무명시절을 이겨냈다.

“어려운 시절마다 인내하다 보면 꼭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새벽기도, 철야, 작정기도 등 기도는 절대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그가 개그맨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아주 어린시절부터 사람들 앞에서 ‘재미있는 포즈’나 ‘헐크’ 흉내로 웃기기를 좋아했던 터라 친구들의 개그맨 권유는 그의 인생 목표에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이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개그맨 공채에 응시를 했으나 4번이나 낙방의 쓴잔을 마시고 1999년 드디어 KBS 개그맨 공채 14기로 당당히 합격해 그해 9월 개그콘서트 첫방송부터 출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4년의 무명시절을 보내야 했다. 특히 지난해 3개월은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개그콘서트 녹화가 시작되기 전 30분 동안 ‘바람잡이’역할만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3개월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녹화전에만 마이크 잡고 녹화가 시작되면 할 일이 없었어요. 이때 분장실과 주차장 등에서 남모르게 많은 눈물을 흘렸죠.

그런데 재석이 형님이 ‘야 난 뜨는데 9년 걸렸어. 힘들어도 다른 생각말고 꾸준히 같은 생각만 해. 그럼 할 수 있어.’라고 말해 그만큼은 견뎌야지 하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난 대선은 그를 한순간에 스타 대열에 올려놓았다.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지난해 11월 초. 개그콘서트 회의 중 한 제작진의 “새 대통령이 나오면 새 스타가 나온다”는 말에서 기가막힌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때 부터 그는 12월 19일 당선되는 대통령 성대 모사를 연습하기로 마음먹고 두 후보 중 비교적 성대모사가 드문 노무현후보를 선택했다.

김상태 성도의 아버지 김계동안수집사(58·여의도순복음교회)의 고향은 합천이지만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상도 사투리를 전혀 몰랐다.

노대통령의 억양과 발음을 연구하기 위해 지난해 11월 말부터 노대통령의 TV토론회, 연설장면 자료, 노사모, 민주당 홈페이지에 들어가 동영상 자료 등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 노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다녔어요. 집에서는 녹화비디오를 계속 틀어놓고 다닐 때는 휴대용 카세트로 듣고 다녔죠. 때로는 노대통령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정도였어요.”

또 노대통령 외모의 특징도 유심히 관찰했다. 이마의 굵은 주름, 노란색 넥타이, 양복 상의 왼쪽 칼라에 부착하고 다니는 사랑의 열매 등이 주요 특징이었다.

이렇게 연습한 노대통령의 성대 모사는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 2003’에서 첫 선을 보이면서 인기몰이를 예고했고 동시에 시청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이 여세를 몰아 대통령도 직접 몇 차레 만날 기회가 닿았다. 첫 만남은 노대통령과 함께 아침 TV토크쇼에 출연했고 이어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게 된 것. 김성도는 이런 여러 번의 각별한 인연으로 “국민과의 약속을 잘 지켜주셨으면 좋겠다”며 “어두운 곳, 가려진 곳에 있는 이들과 서민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정치를 해 주면 감사하겠다”며 노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하지만 오늘의 노통장이 있기 까지는 드러나지 않은 가족들의 육체적·정신적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아버지의 힘겨운 생활은 김성도의 마음 깊이 자리잡아 아직도 눈물을 쏟게 한다.

그는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트럭에 과일을 싣고 다니며 행상을 하셨죠. 지금은 친구 분이 운영하는 한 미술학원에서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어요.”라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성도는 “아버지는 아침 7시면 트럭을 몰고 나가셨고, 저녁 8시가 돼서야 돌아오셨어요. 당시 나는 어렸지만 늘 아버지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어깨를 지닌 분이란 것을 알게됐어요.”라며 눈물을 훔쳤다.

이런 마음의 표현으로 아버지가 생애 처음으로 산 30평형 아파트의 모든 가구를 교체해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부모님이 신혼 기분으로 살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었다”며 “어머니를 경기 일산 가구단지로 모시고 가 많은 돈을 들여 가구를 새로 장만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어머니 또한 든든한 후원자다. 2년 전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응답순복음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 중인 어머니의 기도가 큰 힘이 됐기 때문. KBS 2TV ‘행복채널’ 녹화 중에는 이런 사연을 얘기하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같은 눈물의 생활을 딛고 일어 선 김상태성도의 생활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뜨고 나니까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지더군요. 많은 분들이 알아주는 건 물론이고 일단 경제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더라구요. 너무나 감사하게도 출연료도 오르고 얼마전엔 라디오 CM도 녹음했고 신문 광고도 했어요.”

무명 시절이 길었던 만큼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또 오랫 동안 아들의 눈물을 말없이 지켜봐야만 했던 부모님은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한턱 내느라고 정신이 없으시다고. 그는 “이런 자신과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와 가족들을 많이 사랑하시고 오늘을 계획해 놓으셨구나”라고 생각하며 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김성도는 “정말 중요한 것은 ‘오늘의 나’도 아니고 ‘인기’도 아니다”며 “이 자리에 서게 하신 하나님”이라고 강조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베풂의 삶’을 살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뿐만 아니라 기회가 닿으면 각종 교회 행사 진행이나 간증 등의 사역도 함께 펼쳐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주일 예배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드린다”며 “주일에 방송 스케쥴이 있으면 새벽에 일어나서라도 예배는 틀림없이 드린다”는 김성도의 말 속에서 예배자의 삶 속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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