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교회 부흥은 흑인과 백인들 사이 화해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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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교회 부흥은 흑인과 백인들 사이 화해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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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1.2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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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미국교회의 제1차 각성운동

▲ 조병하 교수
18세기에 이신론과 더불어 합리주의와 유물론의 사상이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미국으로 들어왔다. 또한 고전적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진 존 로크(1632-1704)와 1650년 계몽주의사상에 뿌리를 두고 1812년 스페인에서 활발해진 자유주의 역시 미국에 영향을 끼쳤다. 아르미니우스를 비롯해서 네델란드 신학자들도 미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820년경 유니테리언이라는 명칭을 수용했던 이들은 1830년 ‘자유주의자’라는 명칭을 더 좋아했다. 1815년 윌리엄 채닝은 유니테리언의 그리스도론을 ‘그리스도가 인간보다 우월한 것은 인정하였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성경도 다른 책들처럼 해석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38년 유니테리언의 지성인 랄프 왈도 에머슨(1803-1882)은 하버드 신학교에서 강연하면서 유명해졌고 미국 최초로 사신신학을 말한 사람이 되었다. 하버드는 당시 유니테리언의 본거지였다. 그에 비해 예일은 부흥운동의 영향아래 있었다. 티머시 드와이트(1752-1817)가 총장이었던 예일대학교는 대학생의 1/3이 회개하고 신자가 되었다.
경건주의 운동에서 비롯되었던 18세기 부흥운동은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의 극단적인 경건주의자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친첸도르프(1700-1760)는 1727년 모라비안 형제단을 창설하였고, 1738년 영국에서는 모라비안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독일거주지를 방문하였다가 그들과 거리를 두고 할레 경건주의와 알브레히트 벵엘의 영향을 받았던 존 웨슬리에 의하여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는 1733-35년에 그의 노댐턴 교회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했다. 18세기 초 부흥운동이 일어난 상황은 계몽사조의 합리주의적인 사상이 확산되고, 산업화를 통한 물질의 풍요를 추구하는 사회였다. 침체하는 교회를 각성시키고 도덕적으로 타락해가는 사회를 쇄신하는 신앙운동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18세기 초에서 20세기까지 4차에 걸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식민지 시대의 부흥운동이 대각성운동으로 불리는 것은 매우 넓은 지역과 식민지 생활의 많은 국면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두 명의 “전국적인” 지도자들, 즉 영국의 설교자 조지 휫필드와 뉴잉글랜드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를 배출시켰다. 마크 에이 놀은 조지 휫필드를 18세기 미국에서 ‘독보적 종교지도자’였다고 말한다. 놀은 1740년 9월 19일 휫필드가 보스턴에서 잉글랜드 국교회 성직자와 신학적인 대담에서 나 온 대답 “신생과 경건의 능력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내용으로 프로테스탄트교회 복음주의 원리를 분명히 정의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휫필드의 설교의 핵심은 ‘회심(신생)과 적극적인 성결(경건의 능력)의 삶’이었다. 휫필드는 칼빈주의자 이었다.

1741년 휫필드는 일시적으로 신학적인 문제로 인하여 존 웨슬리와 결별하였다. 그러나 휫필드는 자신이 칼빈이 쓴 어떤 글도 읽은 일이 없었다고 웨슬리에게 편지하였다. 부흥운동은 엄격한 칼빈주의 전통에서 얼마간 이탈하는 성향을 띄었다. 그리고 부흥운동은 미국 내에서 ‘영국 청교도에서 미국 복음주의로’ 옮겨가는 변화를 가져왔다. 부흥은 또한 흑인들과 백인들 사이에 화해의 기회가 되었고 토착민과 하층계급에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미국의 제1차 각성운동은 에드워드와 그의 두 제자 요셉 벨라미(1719-1790)와 사무엘 홉킨스(1721-1803)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칼빈주의에 근거한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반대하기 위하여 1734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라는 제목으로 다섯 차례나 설교하였다. 물론 미국의 부흥운동이 널리 퍼지며 활기를 띄게 된 것은 휫필드가 두 번째 미국방문(1739-1741) 설교를 하면서 부터였다. 역사적으로 부흥운동은 계몽사상과 대립하였다. 그리고 1차 부흥운동은 1763년에 절정에 이르렀다. 휫필드는 영국에 있으면서 자주 미국에 들러 아메리카 식민지를 돌아다니면서 설교하였고 설교여행 중 1770년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는 미국의 그리스도교가 보다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형태를 갖도록 기여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놀은 휫필드가 대각성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가였다면 에드워드는 가장 중요한 변증가였다고 평가하고, 부흥운동이 에드워드를 가장 위대한 미국 초기 신학자로 인정받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1741년 코네티컷의 엔필드에서 행한 설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은 에드워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1746년 ‘신앙의 정서에 관한 논문’라는 글에서 그는 참된 그리스도교는 신앙의 정서의 양이나 강도에서 드러나지 않고 마음이 변화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기쁘게 하는 일을 추구하는 것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에드워드와 그의 제자들은 ‘일관성 있는 칼빈주의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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