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통곡은 들려오는데
상태바
예레미야의 통곡은 들려오는데
  • 운영자
  • 승인 2014.01.21 1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곡하라, 기도하라, 사고하라, 그리고 일하라 - 로크마커의 개혁주의 미학 (18)

이스라엘과 유다에 닥친 위기의 역사에서 예레미야는 깊은 고통 가운데 절규하고 있었다. 당시 백성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거짓된 신념과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가나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셨건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며 허탄한 것으로 마음에 채워버린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어 멸망에 이르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의 탄식은 깊어만 갔다. “누가 너를 불쌍히 여기겠느냐” 예루살렘의 멸망을 두고 어느 누구도 슬퍼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동족에게 닥친 재난을 보고 슬퍼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자였다. 그는 자신의 눈이 눈물의 근원이 되기를 원하며 주야로 통곡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잘못된 신앙은 진리에서 벗어난 왜곡된 환경을 구성할 뿐이었다.

로크마커의 우려도 여기에 있었다. 만일 크리스천이 말씀의 기초 위에 바로서지 못함으로 자신이 보살펴야 할 예술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일이 발생하는가? 당연히 성경의 의미를 담아내는 예술의 창출은 기대하기 어렵다. 예술은 방향성을 상실하여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예술을 위한 예술’로 치달을 확률이 높다. 로크마커에 따르면 이러한 환경에서는 예술의 가치와 의미를 밝혀내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출간된다 할지라도, 이것은 예술이 무엇인지를 확신케 하는 증거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한다.

로크마커는 바로 예술가의 주관적 세계에 몰입한 예술의 의미에 대한 추구가 현대예술의 위기를 가져 왔다고 진단한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존재들로 타인과 상관없이 스스로 자아를 발견하고 표현하도록 홀로 남겨진 천재들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사상에 투철한, 강력한 자아실현 능력과 표현력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예술가만이 성공한 예술가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로크마커에 의하면 예술가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들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바로 예술 자체라는 허상에 매달리게 하거나 절망에 도달되게 할 뿐이다. 이렇게 신비화된 예술의 그늘에는 절망해버린 가난한 예술가의 시체와 타락한 대중예술의 상업주의만 독버섯처럼 가득하게 되었다.

결국 예술은 기독교를 거부하고 삶과 분리되어 너무 높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로크마커는 이렇듯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인간 본연의 형상마저도 상실한 현대 예술의 실상을 위기의 측면에서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가는 실재 저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는 선지자로 둔갑하고 “현행 규범과 제반 가치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며 그 본색을 빛내는 존재”로 자리매김 한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남보다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통곡할 수 있는 지혜의 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