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이끈 예술교육 현장, 바우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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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이끈 예술교육 현장, 바우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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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1.2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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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하라, 기도하라, 사고하라, 그리고 일하라 - 로크마커의 개혁주의 미학 (13)

▲ 안용준 목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총체적 국가위기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국가 경쟁력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 정치적 상황이 여전히 혼미했던 독일은 새로운 전통의 비전을 국민에게 제시하는 일이 필요했다. 당시 새로운 의식을 형성하고 더욱 확고한 국민적 결의를 다지는 일이 쉬워보이진 않았지만 전쟁으로 인해 뒤떨어진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예술교육의 개혁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건축과 디자인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발터 그로피우스(Water Gropius, 1883-1969)는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에 종합 조형학교인 국립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바우하우스 교육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진보한 과학 기술을 활용하여 도시의 감각을 변화시킬만한 미적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한 예로 시각 작품과 조각을 건축의 테두리 안에서 전시하는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공공건물과 예배용 건물 등 미래를 겨냥한 대규모의 유토피아적 건축물의 디자인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로피우스 처럼 사회적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공공 디자인과 건축을 하나의 미학적 시스템 안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던 그의 교육방침은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라슬로 모홀리너지(Laszlo Moholy-Nagy),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리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파울 클레(Paul Klee)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등의 예술가가 바우하우스에 관여하였으며 그들은 간접적이지만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이념을 윤택하게 하는데 공헌했던 것이다.

이후 바우하우스는 불행하게도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되기에 이르지만, 망명한 교수들과 졸업생들이 그 명맥을 계속 이어 나갔다.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이후 독일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설립자 그로피우스가 하버드대학교 건축부장으로, 마지막 교장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일리노이 공과대학 건축학부장으로 각각 부임하여 세계 건축의 양대 산맥이 형성한 것이다. 특히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시카고의 건축가들과 함께 위원회를 결성하고 일리노이공과대학(IIT : 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초빙, 시카고 철골 고층 건물의 신기원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였다.

▲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데사우 바우하우스 전경
이렇듯 바우하우스의 교수들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세상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무엇에 실망했는지, 예술을 향한 세상의 목소리를 듣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술이 사회의 보편적 인식을 반영할 수 있다는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로크마커에 따르면 바우하우스 교수의 이러한 면모는 “지금까지 사용되었던 원리들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원리들의 사용”을 가능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곧 바우하우스는 현대의 양식을 20세기의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든 동시에 진정한 모더니즘의 정신을 전파시킴으로써 세계의 현대화에 공헌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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