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과 게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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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과 게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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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1.27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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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 엽 목사 / 기독교정화운동 대표

편안함은 인류문화가 추구해 온 가치체계의 최종 목표일 수 있다. 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날의 상업주의적 발상이다. 요사이는 빼빼로 하나에도 편리함의 꾀를 써서 물건을 만들어야 아이들이 좋아서 사 먹는다. 빼빼로 한 개짜리는 봉투만 찢으면 곧 바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탐욕스런 장사꾼들은 5~6개를 함께 넣어서 한 봉투를 만들고 거기에 종이 곽을 만들어서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면 돈을 많이 벌기는 고사하고 안 팔려서 결국에는 망하고 만다. 리모콘 시대에 대한 논의도 해서 무엇하랴. 심지어는 음식을 만드는 데에도 리모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편안함이라고 하는 요물이 우리 인간에게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점점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추구해 온 ‘샬롬’이라는 개념의 가치가 히브리인들에게 긍정적인 역할만 했던가? 구약 역사서를 읽어 보면 히브리 인들은 평안함을 얻었을 그 때부터 벌써 타락하기를 시작하여 다시 육체문화 또는 음란문화를 발달시켜 사신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법을 떠나기 시작했던 것을 익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여수룬이 살지매 발로 찼다”(신32:15) 라는 탄식의 말씀은 얼마나 인간이 먹고 사는데 평안함을 추구했는가를 설명해 주며 이를 달성한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가치를 망각하고 타락 했는가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달란트 비유에서 게으른 것을 악하다는 것으로 규정하시고 계시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뿐만 아니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심판을 내리신다. 게으른 것은 잘못하면 편안하다는 말로 대치되어서 우리 인간의 가치체계를 뒤엎고 완전이 하나님의 저주에까지 이르게 하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목회를 하면서 요사이는 전도가 되지 않는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전도가 안 될 수밖에! 왜냐하면 교회 당국자들이 바라는 교인화란 불신자가 교회에 들어와서 교육을 받고 헌금 잘하고 (돈)봉사 잘하는 그리고 말썽피우지 않는 순한 양들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아무 상관없는 그런 인간 모임과 훈련을 싫어하는 것이다.

“너희가 산과 들로 다니며 교인 하나를 얻으면 너희보다 더 지옥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탄식 하시던 그리스도의 말씀도 이 맥락에서 이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류문화의 근본가치라는 미명하에 평안함을 추구해왔고 이것을 많이 달성하고 있고 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똑 같은 가차평가의 유혹에 동조함으로써 이런 것들을 복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신앙진리화 했다면 오늘날의 교회의 퇴보현상과 타락현상은 그리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은 것이다.

편안함의 근본 뜻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평안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부터 오는 기쁨의 평안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는 절대 나태가 있을 수 없다. 부지런해야 하고 즐거워야 하고 민첩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근본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골 1: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돈이라는 매개체도 하나님의 편리를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돈은 필요하지만 돈이 모든 가치보다도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을 우선시 하는 모든 신앙문화(일반문화도 포함하여)는 결국 타락을 가져오고 타락의 근저에는 나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목표는 이 편리함의 유혹을 척결하고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가치체계가 무엇인지를 재삼 탐구해 보아야 한다.

오늘 날 우리는 편안함이라는 뱀이 바로 그대로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물어 중독사시키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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