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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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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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1.1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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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하라, 기도하라, 사고하라, 그리고 일하라 - 로크마커의 개혁주의 미학 (80)

▲ 안용준 목사
창세기는 천지창조 사건을 다루면서 예술에 관한 하나의 지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혼돈의 카오스를 질서의 코스모스로 바꾸어 놓으시고 탄성해 마지않으셨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시고 흡족해 하시며 지으신 세계가 너무도 완벽하고 사랑스러워서 스스로 놀라셨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시고 거듭 반복해서 “좋다.”라고 평가하신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딤전 4:4)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면 이상한 눈으로 보거나 더러는 시대착오적인 순진한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아부를 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쓴다고 오해받는 경우도 있다. 예술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예술가들은 ‘아름답다’란 표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욕망과 탈선의 현장은 늘어만 가고 아름다움의 질서와 가치가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로크마커의 견해대로 아름다움의 질서를 외면한 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기만족적인 양식들을 형상화시키는 데에만 관심을 소유한다면 돌이키기 어려운 미궁에 빠져들게 된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반 기독교적이고 반 인본주의적 정신에 기초한 예술이 자유와 아름다움을 구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종의 공허(void)도 함께 경험될 뿐이라고 한다. 형식으로 드러난 자유와 아름다움이 진실성과 밀접한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크마커는 아름다움이 진실성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최후의 심판’이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장면이 실린 렘브란트(Rembrandt)의 에칭의 주제는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유쾌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진실성에 기인하기에 아름답다 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최후의 심판’은 실제로 천국이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 진리의 프리즘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세상을 보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된다.

렘브란트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 장면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그분 앞에서 도망해 숨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죄의 결과다. 죄를 가벼이 여기면 안 된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성과 아름다움과 선함을 통찰하는 것은 진리를 이해함과 같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일종의 설명도 호소도 아니다. 우리 영혼의 귀를 울리는 거룩한 선포다.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 생명력 넘치는 선포다. 아름다움의 목적과 질서의 세계 속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우연과 카오스의 세계 속에서 살 것인가?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창조주의 존재와 권위를 인정하고 아름다움의 세계와 역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려야 한다. 더욱이 우리가 그리스도인 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일을 한다는 설렘과 비전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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