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감사한 거야, 기쁜 거야, 살만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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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감사한 거야, 기쁜 거야, 살만한 거야”
  • <객원기자=이성원>
  • 승인 2013.11.0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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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치유상담연구원 원장 정태기 목사의 감사 리스트

정태기 목사(한신대 명예교수)가 원장으로 있는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는 지난 18년 동안 18,700명의 상처 입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이곳에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드냐’고 물었던 사람들이 답을 찾았고, 죽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삶을 붙들었다.

마음의 응어리가 터지며 치유되는 감격의 절정 속에 ‘소경이 눈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런 기적의 자리를 깔아준 정 목사 역시 상처가 깊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만난 뒤, 상처가 오히려 사명이 된 정 목사. 그의 감사 리스트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상처 준 아버지, 감사해요
“어렸을 때에 우리 아버지는 두 가정을 거느리셨어요. 어쩌다 집에서 아버지를 보면, 얼마나 무서운지. 그런 아버지와 살아야하는 어머니, 그 갈등 속에서 상처가 많았죠.”

아버지에 대한 무서움은 대인공포증으로 악화됐다. 사람들 앞에 서면 바들바들 다리를 떨어서 생겨난 ‘재봉틀’이란 별명도 이 때문이었다. 미국 유학 때, 지도교수는 “그 대인공포증을 해결하지 않으면 공부해도 소용없다”며 그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조언했다. 나이만 35세 어른이었지, 그는 아직도 ‘어린애’였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로 꽁꽁 묶여있는.

“그래서 미국에서 한 치유공동체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사람이 바뀝니다. 완전 뒤집어진 거죠. 그 후 한국에 나와서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이 뭡니까? 저처럼 상처 있는 분들, 부부, 가정 치유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제가 그럴 수 있게 되었습니까?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면서, 이제 남을 치유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고맙죠.”

정 목사는 추수감사절만 돌아오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고마워서. 과거에 아픔 당한 것 전부 다 이제 감사할 뿐이다. 아픔은 감사다. 하나님 앞에 내놓으면 감사로 바뀐다. 하나님께 내놓지 않으니까, 비참한 삶이 이어질 뿐이다.

섬마을 선생님, 고마워요
초등학교 때까지 섬마을에서 살았다. 학교가 있을 수 없는 곳인데, 뜻 있던 어떤 분이 학교를 세웠다. 지금은 사라진 학교지만, 1회 졸업생이었던 정 목사는, 그때 만난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이 죽으라면 죽을 정도로 우리에겐 절대적인 분이었죠. 그래도 우리가 고치지 못한 것이 있었어요. 욕버릇이죠. 섬사람들 습관이, 말 반 욕 반입니다. 아이들도 그걸 보며 자라니까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걸 고치려고 하셨어요.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1949년 11월 말이예요.”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욕표’를 나눠줬다. 누구든지 욕을 하면 표를 뺏겼다. 제일 많이 빼앗은 사람이 상을 받는다. 선생님은 엄청난 상품을 걸었다. 하얀백지노트였다. 노트가 없어서 비료부대를 잘라 썼던 아이들에게는 ‘눈이 뒤집히는’ 일이었다.

“마지막에 조사해보니, 욕표를 다 빼앗긴 아이가 나예요. 선생님께 불려갔죠. 선생님이 바지를 걷으라고 하시더니, 회초리 10대를 때릴 테니까 세라고 하셨어요. 셋까지는 셌는데, 넷은 죽어도 못맞겠어요. 나도 모르게, ‘아이고매’ 비명을 지르며, 돌아서서 매를 막았어요.”

돌아서서 보니, 선생님은 펑펑 울고 계셨다. 목 멘 목소리로 하신 선생님 말씀을, 정 목사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놈아, 내가 너를 얼마나 믿었는데...” 매를 다시 다 맞고 인사하려고 돌아섰는데, 선생님은 책상에 엎드려 우셨다. 그도 교실로 돌아와 엉엉, 울었다.

“이건 폭탄이었어요. 전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잖아요. 선생님이 저 때문에 우시는데, 그때 전 혼이 나가버렸어요. 그리고 결심했죠. 나도 크면 선생님처럼 훌륭한 신앙인이 될 거야. 선생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거야.”

치유 상담을 하려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많은 난관과 고생 속에서도 치유상담 과정을 마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도 크면 선생님처럼 사랑할거야!’ 정 목사는 단언한다. 그때 그 선생님은 예수님이었다고. 이름 없는 섬마을에 찾아오신 예수님!

소록도 한센병자, 덕분이예요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교회로 가지 못했다. 어렸을 때의 상처가 열등의식과 대인공포증으로 악화됐다. 남들 앞에서 설교는커녕 기도조차 할 자신이 없었다.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일을 했지만 거기서 오히려 더 깊은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 정 목사를 안쓰러워했던 친구가 한 달만 쉬라고 소록도로 보냈다. 그 당시 정부는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로 수용했다. 환자는 불과 200명이었고, 나머지 3천여명은 다 나았지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곳은 일년 365일 예배를 드렸어요. 도착해서 한 교회에 들어갔더니 천여명 되는 분들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아주 지붕이 떨어져 날아갈 것처럼 악을 쓰면서 기도를 하셨어요. 전 한마디도 못하고 있는데, 제 뒤에서, 남자 바리톤 목소리로 누가 울어요.”

울다가 울다가, 한마디 던진다. “하나님, 하나님, 은혜가 이렇게 놀라운디, 어떻게 그 은혜를 다 갚는디요….” 그리고 또 펑펑 운다. 또 한마디 올린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큰디, 어떻게 다 갚는디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우면 저럴까, 살며시 눈을 뜨고 뒤를 돌아봤다. 가슴이 철렁했다. 사람 형상이 아니었다. 머리카락도 없고, 눈썹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구멍만 두개 있었다. 한센병으로 얼굴 모양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박수를 치는데, 손바닥이 없이, ‘몽당이 같은 팔목’으로 치고 있었다.

“제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어요. 그때 제 속에서, 악,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무아지경에 빠진 거지요. 잠깐 눈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눈 떠보니 예배가 다 끝나고 그 많던 사람들도 다 가고 그분과 저만 있더라고요. 제가 물었어요. 뭐가 도대체 그렇게 감사하냐고요.”

그분이 대답했다. “문둥병에 걸렸더니, 고향이 나를 버리고, 친척이 나를 버리고, 가족까지 나를 버렸어요. 그런데 소록도까지 따라와서 기쁨과 감사를 주는 분이 있어요.” 정 목사는 아주머니가 함께 따라 왔냐고 물었다. “아니요, 예수님이요.”

“아, 예수! 14일 동안 그분과 함께 지내면서 내 눈으로 봤어요. 항상 감사하시는 거예요. 기도 할 때마다 나를 끌어안고 감사의 통곡을 해요. 15일째 되는 날, 제가 아침에 일어났는데, 환한 빛이 저를 감쌌습니다. 저절로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인생은 감사한 거야, 기쁜 거야, 살만한 거야!’

힘이 솟아났다. 한 달 예정으로 내려왔던 그는 그날로 서울로 올라갔다. 더 이상 거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때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외국 유학의 유일한 길이었던 문교부 유학시험에 붙었다. 소록도에서 만난 그 한센병자의 감사하는 삶이 정 목사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다.

실패를 준 세상, 사랑해요
가난한 섬소년 정태기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로 유학을 갔다. 어머니께 조르고 졸라 삼촌들 주머니에서 등록금을 짜냈다. 그러나 중학교까지만이었다. 고등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그때는 사범고등학교를 들어가면 장학금을 받았고 졸업하면 교사 발령이 났습니다. 저마다 그 학교를 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무척 들어가기 힘들었죠. 저는 그 학교를 꼭 붙어야 했죠. 그래야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으니까요. 중1 때부터 3년 내내 새벽기도회를 한 번도 안빠졌어요. 그런데 그 시험에서 떨어진 거예요. 얼마나 절망에 빠졌는지….”

3년 동안 간절히 기도했던 교회당으로 뛰어 들어가 데굴데굴 구르며 악을 썼다. 난 죽을 거야. 난 죽어야 한다고. 죽는 방법은 간단했다. 당시 빈혈증이 있던 그는, “안 먹으면 죽는다”는 간단한 진리를 믿고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며칠 굶었더니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열흘 쯤 지나니까 아예 가버렸다. 캄캄했다. 의식이 사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에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니, 어머니가 그를 붙들어 안고 울고 있었다.

“죽지만 말아라, 죽지만 말아라….”

“결국 삼촌이 등록금을 또 대줘서 목포고등학교를 들어가게 됐죠. 그후로 세월이 흐른 후에 어느 날 50중반이었을 때인데, 문득 내가 뭘 하고 있나 가만히 보니, 60만 군대, 전국 2,700개 교회들, 많은 회사들, TV방송 등, 대한민국 4천만의 교사가 되어 있는 거예요. 40년 전에 교사가 못되었다고 죽으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학교 교사보다 더 큰 교사가 되어있는 거예요. 그때의 실패, 그 아픔이 이제는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어요.”

과거에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진짜 감사를 안다고 한다. 아픔을 모르는 사람들은 감사도 모른다. 그는 오늘 죽어도 감사하다. 죽음이 불안으로,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크고 감사하기 때문이다. <객원기자=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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