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출입금지국 ‘예멘’ 그래서 더욱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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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출입금지국 ‘예멘’ 그래서 더욱 사랑합니다
  • 김동근 기자
  • 승인 2013.10.29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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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에 의료 NGO와 병원 세우고 돌아온 인터서브코리아 대표 박준범 선교사

세계 1% 의사에서 ‘예멘 선교사’ 되기까지
육체적, 영적 피로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료

‘예멘’이라는 나라에서 선교를 마치고 돌아온 선교사. 그 소개를 들은 후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맨은 강경 이슬람들이 살고 있는 그야말로 복음의 불모지기 때문. 뿐만 아니라 예멘 정부가 철저하게 기독교인들의 선교를 막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 곳에서 전문인 선교사로 수년을 사역했다. 어딘가에서 어렵게 전해 받은 성경을 버스에 놓아두고 내려 전파하고, 병원 사역을 통해 그들의 가장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물론 추후 편해진 관계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이어오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귀국했다. 인터서브코리아의 대표로 사역에 앞장서고 있는 박준범 선교사(인터서브코리아 대표)를 만났다.

# 믿음이 자리 잡는 시간
박 선교사의 성장과정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조금 특별했다. 누구나 신앙성장을 하다 조금의 삐걱거림은 있을 만도 한데, 그의 신앙은 반석 위에 집이 세워지듯 어릴 적부터 견고하게 세워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목회자의 꿈을 꾸기보다 하나님께서 어린 시절 주셨던 ‘의사’의 꿈을 꾸며 자라났다.

“대학 시절,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에 OMF의 제레미 선교사가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학부에 정착해 우리와 교제하기 시작했죠. 한 번씩 열리던 선교기도회가 얼마나 은혜가 되는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어느 날 8명의 청년들을 불러 선교적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다른 문화를 접하는 시간을 통해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게 된 기회였습니다. 그 훈련을 받은 이들 중 6명은 선교사가 됐습니다.”

박 선교사에게 그 시기는 구원과 선교라는 과제가 정리되었던 시기였다. 또한 미래를 바라보며 선교에 대한 부담도 갖게 됐다. 선교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삶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의대생 박준범은 선교에 대한 막연한 계획을 그리며 그렇게 대학 시절을 보냈다.

# 의사가 되자
“세계 1%의 의사가 99%의 환자를 치료하고, 99%의 환자가 1% 의사를 기다리고 있다. 부의 불균형과 같이 의사도 불균형이 생겼다. 의료가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장의 개념으로 넘어가버렸다.”

그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문구는 그의 심금을 울렸다. 물론 의사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은 보장되지만, 그는 99%의 의사가 되기보다 1%의 의사가 돼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돌보고 싶었다.

의예과에 진학하고 병역문제 해결을 위해 공중보건의로 시간을 보냈다. 그 기간 중 결혼도 했고, 여전히 선교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계속해서 영어공부도 했고, 전문의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 속에서도 전문인선교훈련을 받는 등 조금씩 선교사의 삶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내가 선교사로 서원했으니, 당신도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늘 아내의 의견을 존중했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종합병원의 의사로 부임해 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 늦잠을 자 급히 큐티를 하려는 순간, 하나님은 그에게 시편 48편 6~9절의 말씀을 보게 하셨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종합병원의 의사로 많은 월급을 받으며 살던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보고 그는 무릎을 꿇었다.

# 어디로 가야합니까?
선교 파송지를 전하기 전 영국으로 향했다. 선교훈련과 신학훈련도 받았고, 언어를 익히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훈련의 막바지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금식하며 기도를 하던 중 한 선교사님의 선교편지를 읽게 된 그. ‘예멘은 육체적으나 영적으로나 피로가 많은 나라입니다’라는 그 편지의 구절을 보고 그는 예멘을 파송지로 품었다.

그들의 육체적 피로를 자신이 가진 달란트로, 영적 피로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하고 싶었다.

6개월 간 예멘에 대해 공부하며 준비했다. 그리고 떠나 새벽 6시에 도착했던 예멘은 어린 시절 티비에서 보던 아라비안나이트의 신비로운 도시였다. 하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공항에서부터 선교지의 치열한 삶은 시작됐다.

“열심히 아랍어를 익혔습니다. 그들에게 확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준비단계였죠. 그 후에는 그 사회 속 의료현장을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현지 군 단위 병원에서 약 2년을 봉사했습니다. 그 후에는 예멘의 의료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글로벌 케어’라는 의료 NGO를 세우기도 했죠. 덕분에 비자에 대한 걱정도 덜게 됐습니다.”

그 후 글로벌케어의 예멘 지부장으로 섬기며 빈민들을 위한 클리닉을 열었고, KOIKA의 도움을 받아 도시빈민이 많은 곳에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예멘에 특히 많았던 구순열 환자들을 위한 자선단체도 만들어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왔다. 바쁜 시간 속에서도 그는 복음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씨앗을 뿌리다
공개적인 복음전파를 해선 안 되고, 하다 잡히면 추방을 당하는 어려운 상황. 그는 관계전도를 복음전파의 한 방법으로 선택했다.

“병원에서 만난 직원과 나와 친한 이웃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친구가 되고 서로 마음이 오갈 때, 그때 집으로 초대해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전도책자를 주는 등 종교적인 대화를 하기도 했죠. 주말이면 일부러 대학가에 가 쪽 복음 성경을 두고 오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적 정보가 너무 부족한 예맨에서는 성경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행위라는 생각을 했던거죠.”

제자훈련도 시작했다. 자국민 전도자들이 많이 세워졌을 때 기독교에 대한 분위기도 수면 위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랍어로 그들과 찬양하고 말씀을 나눴던 시간은 지금까지 그에게 기뻤던 시간으로 남았다.

그가 예멘에 가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주변으로 소풍을 가기도 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했지만, 2007년부터 납치와 테러가 일어나는 등 사회가 위험해졌다. 그리고 지금은 이슬람 테러단체 ‘알카에다’가 예멘으로 이동을 한 상황이라 더욱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 에서도 그는 예멘을 위해 기도한다.

“예멘은 저에게 있어 은연중 꿈을 이야기하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곳에서 무사히 사역을 하고 돌아왔지만, 저의 마음의 고향 예멘이 언젠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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