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비누스 영향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박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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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비누스 영향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박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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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0.0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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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프랑스어권의 종교개혁과 칼비누스의 개혁 참여

독일어권인 비텐베르크와 쮜리히를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개혁에 이어 세 번째 중심지는 프랑스어권인 제네바로서 요한네스 칼비누스(쟝 깔뱅, 1509-1564)를 중심으로 개혁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은 1522년부터 나타난다. 처음에는 프랑스의 개혁운동이 루터의 글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1516년 협정서에 의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국가는 교회로부터 많은 수입을 올렸고 이런 조건을 유지하는데 더욱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프랑소아 1세(1515-1547)는 프랑스의 ‘루터파들’을 종교재판과 화형으로 박해하였다. 그를 뒤 이은 앙리 2세(1547-1559)의 치하에서 이단 규율을 더욱 강화하여 그들을 화형에 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발전을 계속해 왔고, 칼비누스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박은 계속되었다.

프랑스 개혁운동은 칼빈주의 영향을 받기 시작할 때쯤 ‘휘그노파’라는 이름으로 ‘루터파’라는 이름이 밀려났다. 이 이름은 연맹체라는 말에서 유래한 듯하다. 1562년부터 1598년까지 8회에 걸친 휘그노전쟁이 있었다. 박해의 최고조는 소위 바톨로매우스의 밤(1572)이었고, 프랑스왕 앙리 4세는 낭트칙령으로 ‘휘그노파’에게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칼비누스는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누아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랄드 깔뱅은 누아용의 주교 샤를르와 성당참사회에 고용되었다. 칼비누스가 어릴 때 어머니 세상 떠났고, 1521년부터 칼빈에게 성직록이 지불되었다. 이때 아버지는 칼비누스가 신부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1523년 8월 그는 공부를 위하여 파리로 갔고, 당시 그곳에서 함께 공부했던 쟝 발리에르가 루터사상을 가졌다고 처형당하였다. 이미 1519년 초부터 프랑스 지식인들은 루터의 글을 읽기 시작하였었고, 1521년 4월 15일에는 파리대학 신학교수회는 교황의 지시에 따라 루터의 가르침을 비난하였고, 같은 해 8월에 파리의회는 루터의 글을 금지하였다. 칼비누스는 1527년까지 파리에서 철학, 인문주의, 유명론, 교부학 등의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 때에 그는 공식적인 학과과정인 7학예를 공부함으로 문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참사회와 갈등을 빚고 있었던 아버지는 그가 신학 대신에 법학을 공부하기 원했다. 칼비누스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오를레앙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그는 루터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멜키오르 볼마르에 의하여 헬라어 공부를 권면받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1529년 보르쥬로 대학을 옮기게 되었다. 피에르 드 에스또일의 지도를 받아 법률적인 지식이 향상되어 공부하는 동안 가르치는 일도 감당하였다. 자정이 넘도록 법률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성경을 연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칼비누스는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1532년에 파리에서 ‘인자함의 미덕에 관련한 세네카의 책에 대한 주석’을 썼다. 1531년 8월부터 1534년 5월까지 파리에 있는 동안에 인문주의 연구를 하였고,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진지하고 박학한 인문주의자가 되었다. 또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칼비누스의 종교개혁으로의 전향은 1533년 8월부터 1534년 5월 사이에 ‘급격한 회심’으로 일어났다. 1533년 11월 1일 ‘모든 성인들의 날’에는 파리 대학 총장 니콜라스 콥프가 마 5:3를 본문으로 행했던 설교내용이 로테르다무스의 에라스무스와 마르틴 루터의 사상에 유사하였고 스콜라신학에 대하여 반박하였는데, 파리 대학 신학부와 의회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거리낌 없이 대담하고 공격적이었다. 그런 까닭에 의회법원은 그에게 법정에 출두하도록 소환장을 보냈다. 콥프는 자신의 고향인 바젤로 돌아갔다. 칼빈 역시 이 설교원고를 함께 도왔음으로 그의 고향 누아용으로 도주하였다. 1534년 10월에는 프랑스 왕의 프로테스탄트교회 박해로 인해 프랑스를 떠나 스트라스부르를 지나 바젤로 갔다. 1536년 1월 바젤에 도착할 때까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행하였는데, 이 때 칼비누스는 개혁의 지식을 얻게 되었다. 또한 그는 바젤에 먼저 와 있던 니콜라스 콥프와 미래의 제네바 동역자 피에르 비에, 쯔빙글리의 계승자였던 하인리히 불링거와 사귀게 되었다. 1535년 6월에 바젤에 정착하였던 에라스무스를 만났는지에 대하여는 알려지지 않았다.

1536년 8월 칼비누스는 1534년부터 기획하였던 ‘그리스도교신앙의 강의(기독교강요)’ 초판을 써 출판하게 됨으로써 프랑스언어권의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글은 프랑스왕 프랑소와 1세에게 헌정하는 형태로 쓰였다. 이 책은 여러 차례 수정 보완 되었는데 1539, 1543-1550, 그리고 최종판이 1559년에 출판되었다. 내용의 분량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구성방법에 있어서도 놀라운 진전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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