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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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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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9.04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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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기 목사 / 예수로교회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릴케(Rainer Maria Rilke)의 ‘가을날’(HERBSTTAG)이란 시의 첫 구절이다.
매미소리 스산해지고 싱그러운 가을하늘이 상큼한 산들바람을 싣고 온다. 생기의 바람이 임하는 곳에 생명의 움직임이 열매를 맺게 한다. 들녘에 고개 숙인 이삭들이 흔들림 속에 영글어 가고, 길가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흔들림은 창조주를 찬양함이라.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문호(文豪) 나쓰메 소세키는 그의 소설 ‘마음’에서 길가를 스치는 산들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지만 쉽게 꺾이지 않는 코스모스처럼 마음의 흔들림이 사랑의 중심임을 노래했다. 코스모스가 바람을 흔들지 못하므로 바람이 코스모스를 흔든다. 민들레의 홀씨는 바람의 흔들림으로 흩어지지만 바람이 머무는 곳에 새로운 새생명을 나른다.

종북 용공분자들이 국기를 흔들고, 마귀가 교회를 흔들고, 맘몬의 영이 삶의 터전을 흔들고. 사단이 밀 까부르듯 사명자들을 흔들어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속에 중심이 서고, 담금질 속에 정금이 나온다. 그럴지라도 쏠림 속에 반전이 있고, 흩어짐 속에 거룩한 씨들이 그루터기가 된다.

매미의 울음을 보라. 한 번의 짝짓기를 위해 일생을 기다림과 인내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담금질함으로 마침내 우렁찬 울음으로 생의 마지막을 완성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인생과 변화의 사막에서는 지도를 따라가지 말고 나침반을 따라가야 한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지 말고 오아시스를 찾아야 한다. 바다거북은 수백 킬로미터를 멀리 여행한다 할지라도 마지막 산란을 위해서는 어김없이 자기가 태어난 바로 그 해변으로 되돌아온다.

인생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에 대한 돌파구는 심령에 장착한 십자가의 나침반과 넘치는 성령의 생수의 오아시스다. 연어는 길을 묻지 않는다. 물위를 걸으려면 배에서 내려야 한다. 요단 앞에서 우물쭈물하면 안 된다. 법궤를 멘 자는 넘치는 강물 위에 첫발을 내딛는 순종의 결단을 해야 한다.

가을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추수의 계절이다. 단풍의 아름다움은 떨어짐에 있다. 영혼의 때를 위하여 옷깃을 여미고 자기의 소위를 살펴야한다. 생명이 없는 타작마당에 어찌 영혼추수의 기쁨이 있겠는가. 교회가 복음이 빛을 바래고 생명의 역동성을 상실하면 인위적인 모임과 조직만 있을 뿐이다.

십자가의 복음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흔들림이 없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여기면 곳간에 드릴 알곡이 없다. 목회에 성공이란 단어를 빼야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형통일 뿐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정상에 꽂혀 있다. 오를 때 보지 못한 많은 것들이 내려올 때는 보이기 시작한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면 내 발을 씻으리.”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말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조화의 능력이다. 이번 백석교단의 합동총회가 한국 교회에 들려주는 아름다운 가을의 합창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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