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의 경계에서 평화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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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의 경계에서 평화를 생각하다
  • 김동근 기자
  • 승인 2013.07.24 1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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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청년평화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한 주간의 여정(상)

▲ 6.25 당시 끊어진 압록강 단교. 안개 속으로 북한이 보이는 듯하다.
첫 출장, 첫 해외 출장, 처음 갖는 일주일 간의 휴식 등 여러 수식어를 달고 있던 이번 여정은 설렘을 가득 안고 시작됐다. 비록 전날까지 기사마감의 압박에 시달리다 떠난 순례길이었지만 여행 가방을 꺼내 그 안을 채우면서,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면서 무딘 심장은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결코 공항에서 모이기로 한 시간이 늦어서가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설렘으로 가득한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전날 기사마감 덕분에 뜬눈으로 밤을 세워 졸음이 쏟아질 만도 한데, 여전히 눈은 말똥말똥 했다. 기대가 되는 여정이긴 했나보다. <편집자 주>

떠나자, 떠나.
공항에 도착하니 눈에 익은 얼굴들이 하나 둘 눈에 띈다. 저마다 한껏 꾸민 모습들. 그들의 차림새에도 설렘이 묻어났다.

그 설렘을 최대한 깊이 느끼며 여행을 떠나기 전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떠나야 할지 생각했다. ‘백두산 평화 순례. 8주간 이어졌던 평화교육. 우리에게 이런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평화로운, 또는 평화롭지 못한 현장을 방문하며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고, 평화를 가슴에 품은 청년으로 거듭나는 일. 그게 바로 나의 그리고 우리의 몫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가진 각자의 종교에서 배운 ‘사랑’이 첨가된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주간 마주친 얼굴인데 아직까지 낯이 설다.

점심시간을 조금 지나 떠나는 비행기의 시간 때문에 다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대한민국 땅을 박차고 오르는 비행기. 그리고 점점 작아지는 건물들. 아, 내가 정말 대한민국을 떠나고 있구나.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건네는 음식은 가리지 않고 뱃속으로 넣는다. 누구나 주는 것을 혼자 거절하면 괜히 손해를 보는 기분이다. 가득 차 땅땅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잠을 청하지만 여전히 정신은 또렷하다. 그리고 얼마간의 난기류에 비행기의 기체가 흔들리다 잠시 후 대련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장의 안내멘트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다.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 찾을 수 있을 꺼라 생각했던 중국. 그 대륙에 드디어 발을 얹게 된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중국어.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내가 중국에 도착했구나.”

키가 작고 당차보이는 한 젊은 여자가 우리를 찾는다. 일주일간 우리와 함께 할 가이드다. 북한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 화교란다.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하다.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에서 살았고 순간, 순간을 보냈던 그의 기억을 공유하고 싶었다. 처음 볼 때부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북에서 태어나 남으로 내려오신 외할아버지의 피가 내 안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까.

관광버스를 타고 안중근 열사 유적지 근처에 다다랐다. 중학교 학생쯤 됐을까? 까까머리를 한 학생들이 도로로 쏟아져 나온다. 단발머리를 한 여학생들도 함께. 손때 묻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 그런지 호기심 어린 눈빛은 없다. 그저 그들에겐 일상이었다. 안중근 열사를 생각하며 유적지를 찾았다.

▲ 안중근의사가 투옥했던 여순감옥 앞에서 종교청년평화학교의 학생들과 실행위원들이 모였다.
‘고집’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냥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굳이 어려운 길을 나서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한 안중근 열사.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가 그에게서 왔음을 알지만,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선 폭력과 다툼이 있었다. 문득 그가 이룬 평화가 진정한 의미의 평화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툼과 폭력 속에서 얻어진 평화. 여하튼 나는 덕분에 평화를 누리고 있다.

저기 보이는 곳이 북한이야.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호텔에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조선족 여성 두 명이 안내를 한다. 뭔가 기분이 묘하다. 유쾌하지 않다. 토스트도 맛있었고, 요구르트도 좋았다. 그런데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그 기분은 다음 여정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압록강변에 다다랐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 안타깝게도 안개가 잔뜩 낀 압록강은 시간이 흘러도 진전이 없는 남북관계를 말하는 듯 했다.

누군가 저 멀리 북한이 보인다고 말한다. 곁눈질을 하지만 안개에 싸여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또 누군가가 북한 사람을 봤다고 속삭인다. 그런데 내 눈엔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보이는 땅이 북한 땅이란다. 이 강을 건너면 북한에 다다를 수 있단다. 그 말에 가슴이 뛴다. 나와 한 민족이라고 늘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동포가 사는 땅에 나는 갈 수 없다. 게다가 거기 사는 이들은 하루 세 끼를 먹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다. 나는 도울 수 있지만, 도울 수 없다. 불편하다. 몹시.

유람선이 우리 일행만 태우고 유유히 압록강을 거닌다. 누군가 어깨 너머로 망원경을 건넸다. 망원경을 갖다 댄 눈이 북쪽으로 향했다.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그렇게 다시 유람선이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허탈한 마음으로 배에서 내려 다시 버스에 올랐다. 불편한 마음으로 앉은 버스에서 누군가 건네는 볶은 해바라기 씨 한 움큼. 사양 앉고 받아 입 속으로 털어 넣는다. 고소하다. 고소한 향내가 입 안 가득 퍼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북을 생각하며 괴롭던 마음은 해바라기 씨로 인해 언제 그랬냐는 듯 씻겨 내려간다. 모순이다.

▲ 북한 여성들의 구슬픈 노래가락이 흘러나왔던 묘향산 식당.
저녁, 집안의 묘향산이라는 한글이 적힌 식당에 도착했다. 출입구에 들어서는데 “어서오십시오”라는 말로 북한 여성이 우릴 맞이한다. 식탁에 둘러앉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 인 듯 했다.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이 반갑기는커녕 다시 슬퍼졌다.

잠시 후 북한 여성들의 공연이 시작된단다. 이내 시작된 공연에서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북한의 가요들이 흘러나왔다. 어느 중국인이 일어나 꽃다발을 들고 무대로 향한다.

북한 여성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는 포옹을 청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에게 전달되던 꽃다발 또한 식당에서 돈을 주고 사야하는 것이란다. 하나의 수익사업이었던 것이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식당 바깥으로 나섰다. 그저 안됐다는 생각을 하기엔 북한 여성들의 태도는 정말 당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 정부가 믿고 해외로 보낸 이들인데, 사상교육이 잘 되어있겠구나 싶었다.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도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괜히 가슴이 먹먹하다.

벌써 캄캄해진 후, 식당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북한 여성들의 노래가 구슬프게 들린다.

진짜 중국을 만나다
눈을 떠 잠을 쫓아냈다. 고구려 시기 ‘국내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집안 지역에는 고구려의 유적이 많았다. 예를 들어 광개토대왕비와 대왕릉, 장군총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우리에겐 우리 역사지만, 중국에선 그들의 역사였다. 여행객들의 뒤를 쫓는 한 사람이 있었다. 혹여나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거나 하면 그 여행객들을 대동한 가이드는 다시 일을 하기 힘들단다. 진정 그들의 역사라면, 왜 그리도 두려워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백두산 아랫마을 송강하로 향했다. 버스에서 보내는 긴긴 시간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잠은 오질 않고, 시간도 가질 않는다. 오래오래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바깥에서 만난 조원들. 조금 멀리 돌아보자며 중국으로 나섰다. 정말 중국으로 나섰다는 표현이 맞겠다. 여행을 떠난 지 3일째. 음식 말고는 중국을 느낄 수 있을만한 기회는 거의 없어 아쉬운 참이었다.

늦은 시간 나와 불이 켜진 상점은 얼마 없었지만,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선물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멀리 보이는 널따란 광장에는 전기로 움직이는 듯한 범퍼카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치 우릴 기다리고 있다는 듯.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여덟 명이 둘씩 짝을 지어 범퍼카에 올라탔다.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며 다가오는 중국인들.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그들 틈에서 노곤했던 여정, 조금씩 쌓여갔던 불만,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였다.

중국인들과 함께 격하게 부딪히자 이내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러니하지만 정말 그랬다. 얼마 안가 멈춘 범퍼카를 보며 주인 아주머니께 고개를 갸우뚱하니 다른 것을 바라보며 다시 타라신다. 그야말로 평화였다. 신났던 순간을 뒤로하고 모두 함께 먹을 과일을 사러 상점으로 향했다. 조원들의 발걸음이 다들 가벼운 듯 했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이야기도 술술 나오기 시작한다. 한 방에 모여 둘러앉아 서로의 종교에 대해 묻고, 우리 여행에 대한 생각을 모았다. 평화를 찾으러 온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생각과 모습은 어땠는지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제서야 우리가 종교청년평화학교의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그간 물속에 가라앉아있던 우리의 정체성. 그리고 그날 밤은 편안함 속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세계의 평화, 한 나라 안의 평화, 이념간의 갈등…. 모든 평화의 시작은 개인의 평화이리라.

<중국 단동=김동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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