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을 지나 두만강, “저기 북한 사람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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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을 지나 두만강, “저기 북한 사람이 보여”
  • 김동근 기자
  • 승인 2013.07.30 1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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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청년평화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한 주간의 여정 (하)

▲ 두만강 나루터에서 바라본 북한. 이 강을 건너면 북한땅이다.
ACRP서울평화교육센터에서 주관하는 종교청년평화학교. 20여 명의 청년들이 8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중국으로 향했다. 남과 북의 분단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북 국경지역에서 평화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순례의 여정이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등 각자 가진 종교는 다르지만 함께 지향하는 것은 ‘평화’. 종교간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모였다. 그리고 서로의 종교를 이해하고 평화를 부르짖었다. 그들이 떠난 백두산평화순례의 길에 함께했다. <편집자 주>

천지를 볼 수 있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백두산으로 향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여행 가방 구석에 넣어뒀던 운동화도 꺼내 신었다. 천지의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하다는 조언에 일회용 우비도 챙기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천지로 향하는 길은 총 네 곳. 동파, 서파, 남파, 북파가 바로 그것이다. 북한에서 오르는 동파를 제외하곤 나머지는 모두 중국을 통해 오를 수 있다. 그 중 우리는 ‘서파’라는 곳을 통해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1442개의 계단을 올라야한다는 설명도 따랐다. 최소한의 짐만 챙겨 백두산으로 이동했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버스. 바깥의 날씨는 을씨년스러웠다. 약간의 먹구름이 낀 하늘. 중국으로 떠나오기 전 한 지인은 “천지를 보기 위해선 착한 일을 많이 했어야 한다”며 “그 만큼 날씨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몇 번을 간 사람이 한 번도 천지를 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과연 우린 천지를 볼 수 있을까.

산에 오르기 전부터 고산병을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2750m의 높이를 자랑하는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 그럴 만도 했다. 빠른 걸음으로 산에 오르자 땀이 나기도 했지만, 오를수록 떨어지는 기온에 땀은 이내 사라지고, 상쾌한 마음이 차올랐다. 힘들어하는 이들의 짐을 먼저 들어주겠노라 나서는 이, 손을 잡고 끌어주는 이, 뒤에서 밀어주는 이. 어찌 보면 우리에게 이미 평화는 깃들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 백두산 천지. 천지의 고요함 속에서 또다른 평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섰다. 탁 트인 산의 정상. 천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맑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게 산을 오르는데 더욱 도움이 된 듯.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가 우리를 맞았다. 너도 나도 셔터를 누르기 바쁜 상황. 한 켠에 우두커니 서서 눈을 감았다. 천지와 함께 눈에 들어왔던 ‘조선’ 37이라는 비석. 어찌됐던지 천지를 넘어 저 멀리 보이는 곳도 북한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했다. 나의 민족, 나의 핏줄.

백두산에서 내려와 다음 목적지인 이도백하를 향해 다시 버스는 달렸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하나 둘 호텔 2층의 한 공간으로 모였다. 여정을 시작하고 처음 갖는 전체 모임이었다. 참가자를 대표해 개신교 황보현 목사가 기도를 했다. 우리의 순례가 하나의 여행이 아닌, 평화를 바라는 순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가 끝나고, ACRP서울평화교육센터 김광준 신부의 인사가 이어졌다.

이번 순례를 끝으로 우리 1기는 마감되지만, 종교 갈등의 어려움 속에서 평화를 이끌어내는 선구자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이 이어졌다. 또한 지금 맺은 우정의 끈을 놓지 말고 지금 이 곳에서 만들어진 평화 공동체를 유지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우리의 여정에 함께한 소설 ‘찔레꽃’의 정도상 작가의 평화에 대한 조언도 이어졌다. 먼저 우리 여정의 제목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는 문구를 시작으로 이어진 이야기는 쉬운 말로 풀어져 많은 조각들의 지식이 젊은이들에게 흘러가는 값진 시간이 됐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꿈에 본 내 고향’이라는 가요의 가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오늘 북한땅이 가장 잘 보이는 두만강변을 지나게 된다.

계속 북-중 접경지역을 다녀 한편으론 마음이 무뎌지기도 했었는데, 두만강은 조금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다지 깊지 않은 강의 수심, 물살도 별로 세지 않은 곳이 많아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두만강을 통해 이탈하게 된다는 정도상 작가의 설명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버스가 멈췄다.

“비법월경은 징벌을 받는다.”
“불법 월경을 엄금한다.”
“도문강 수면에서 놀지 못한다.”
“밀수 마약매매, 고기잡이 등 변경 질서와 안전을 파괴하는 행위를 엄금한다.”
그리고, “조선쪽에 대고 말을 걸지 못한다.”

▲ 중국 연길에 위치한 두만강 나루터. 100년을 넘게 상호무역, 원목수송 등으로 사용되다가 1930~40년대 철도대교가 개통된 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버스에서 내리니 눈에 띄는 구절들이었다. 두만강 나루터라는 이름을 가진 강 유역. 멀리 김일성의 얼굴이 걸린 건물이 보인다. 까무잡잡하고 키가 작은 청소년 둘이 강 유역으로 향하는 모습을 봤을 때는 “저들이 혹시 탈북을 감행하려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멱을 감으러 나온 아이들이었다.

내 눈으로 북한의 젊은이들을 직접 보게 됐다.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이들. 그들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말을 할 수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나루터를 거슬러 다시 올라오는데, 한 노신사가 망원경으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말을 걸어보니 멀리 보이는 곳이 자신의 고향이란다. 빨리 버스에 타야한다는 재촉으로 급한 인사를 나눴다.
 
“나중에 만나요”라는 인사에 “그럽시다”라고 답하는 노신사.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인사를 하고 싶었다. 정말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남긴 채. 버스는 기나긴 여정이 기다리는 연길역으로 이동했다.

기차 속 종교간 대화
우리가 탄 기차는 한 칸에 침대가 4개씩 놓인 기차.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나름 깔끔하게 침구도 정리되어 있었고, 작은 선풍기 하나가 좌우를 돌며 더위도 식혀주고 있었다. 김밥으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조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찰나. 한 차례의 모임이 열렸다.

어려웠던 점, 부족했던 점, 그리고 지금이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등을 서로 나누며 의견이 모아졌다. 8주간의 평화교육이 스며들어있기 때문이었을까. 서로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기보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성숙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연출됐다.

함께 모은 의견은 실행위원(각 종교들의 실무자들로 채워져 있다. 이번 여정에는 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의 실무자가 참여했다.)들이 각 방을 돌며 각 종교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과 체제에 대해 그리고 우리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궁금증에 대해 대답해주는 시간을 갖자는 것.

▲ 각 종교의 실무자들이 기차의 각 칸을 돌며 자신의 종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학생들.
어찌 보면 우리 평화순례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시간이었던 것 같다. 땀으로 젖어 조금은 불쾌하기도, 어두운 조명 때문에 졸음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눈을 부릅뜨고 서로의 종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우리가 정말 종교청년평화학교의 학생임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주어진 시간이 넘어가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실행위원 분들을 보내드리지 못하는 모습. 이것이 서로의 종교에 대해 이해하고, 평화를 향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됐다.

정말 가는 거야?
새벽에 눈을 떴을 때 기차는 열심히도 달리고 있었다. 기차의 양쪽 끝에 마련된 세면대에서 간단히 양치와 세수를 하고, 기차에 들어오는 중국의 아침 바람을 맞았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날이 드디어 밝았다. 6일이라는 시간은 참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 평화순례를 온 사람으로 무엇을 느꼈고, 또 어떤 것을 해냈는지에 대한 반성 등 마지막 날이라 아쉬움이 많이 남는 아침이었다.

지난 밤, 마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실행위원 분들과 함께 잠깐의 이야기가 오갔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도 아쉬움은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짐을 꾸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할 때. 넉넉하게 빈 채로 왔던 여행 가방은 왜 그리도 잘 닫히지 않았을까. 이번 여행으로 인해 무지하던 나의 머리와 마음속도 닫히지 않을 만큼 가득 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입국심사 후 탑승, 우리의 여정에 함께한 가이드와 아쉬움의 인사를 나누고, 다음을 기약했다. 이들 또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백두산 천지를 등지고 평화학교 순례자들이 함께했다.
대한민국에 도착하니 그리도 덥던 중국과는 달리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이미 어둠은 깔려있었다. 이제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모두 함께 모여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이 다시 허락될까. 인천국제공항에서 우리는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낯선 사람들과 어떤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떠난 여정. 더군다나 그 여정은 하나의 순례였다. 아픔과 슬픔의 현장을 눈으로 목격하고, ‘사랑’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종교를 가진 청년들이 모여 평화의 역군이 되는 것.

종교 간의 평화를 넘어 우리 사회 속 평화, 남북 간 평화, 세계의 평화까지. 세계의 평화라는 것이 만화영화에서 나오는 목표가 아니라, 진정 우리의 삶의 꿈이요 비전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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