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권 문화칼럼]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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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권 문화칼럼]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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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5.2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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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권의 기독교미술 간파하기 (15)

돌밥, 돌밥 해도 돌보다 쌀이 많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삶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한 치 건너 두 치’라는 속담처럼 자신과 피붙이의 촌수(혈연), 학연, 지연과 같은 연고로 서로 감싸고 보호하고 편들며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고 그 것을 서로 나누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섭섭한 일이나 감사한 일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 때 비로소 개개인의 수준과 성격, 인격에 따라 행동 방식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일상에서 신문의 사회면이나 방송의 뉴스를 보면 세상은 온통 서운한 일, 억울한 일, 살인, 방화, 강간, 사기, 부정, 부패로 얼룩져 희망이라고는 사라진 세상 같다. 교회를 개척하여 신도수가 많아지면 성경대로 살아가지 않고 슬그머니 교주로 행세하는 사이비 이단 같은 가라지가 있는 것처럼, 대학생들은 등록금이 비싸다하며 공부보다는 아르바이트에 집중하고, 당국은 등록금을 인하한다며 졸업학점과 학기별로 주당 강의를 한 주씩 줄이고 학점 당 강의 시수를 줄이며 본질을 왜곡시키는 일을 하기도 한다. 반면에 ‘불행 중 다행’, ‘새옹지마’ 라며 감사한 일, 감사한 사람을 무수하게 만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과 일가친척, 친구나 친지들과 소통하며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절망적인 일을 당하고도 이웃의 불행을 거울삼아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아름다운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이다. 결국 ‘돌밥, 돌밥 해도 돌보다 쌀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물 말아서 일어 먹는 지혜를 발휘하는 사람도 많이 있음을 본다.

▲ 사랑의파장130201

용서의 조건
우리는 부와 권력, 명예가 아무리 높다 해도 군자나 슈퍼맨이 아니다. 주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보통의 사람이다. 그리고 성령의 보호와 관심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다. 소개하는 작품은 ‘용서’ 란 제목으로 필자의 최근작이다. 최근에는 사물의 형상 보다는 성서의 귀한 단어를 화면에 직접 가져오고 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온유, 사랑, 용서 등 여러 작품들 중에서 ‘용서’를 선정해보았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고통과 멸시 속에서 피 흘리셨다. 그 피의 값으로 우리는 용서받고 구원 받았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는 없어도 아주 작은 것부터 용서하고 내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 받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용서하셨다. 그럼에도 인간적인 삶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얽혀 매우 복잡하다. 이렇게 다양한 사회에서도 요셉과 같은 삶이 아니어도 마태복음 18장의 할 줄 모르는 종과 같이 되지만 않으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 용서도 받아본 사람이 용서할 줄 안다. 용서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귀한 요소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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