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으로 세상 변화시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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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으로 세상 변화시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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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5.2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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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교수 (한일장신대)

한국 기독교는 120여 년 세월을 거치며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하지만 신앙 선배로부터 그 중심에서 이어온 믿음의 명맥은 변함없이 연결돼 내려오고 있다. 이런 한국 교회에 최근 들어 대내외적으로는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단지 분쟁과 갈등을 뛰어넘길 원하는 요청의 목소리는 아니다. 신앙인으로서 교회와 사회 속에서 걸어야 할 길에 대한 요청이 힘을 얻고 있다. 이와 관련 목회윤리연구소는 최근에 계간한 목회와 윤리 7월호에 관련 강좌 두 편을 게재했다. 관련된 내용 중 지상강좌 두 편을 발췌해 실었다. <편집자 주>

우리나라는 기독교국가로 착각될 정도로 기독교인이 많다. 특히 지도층에서 이는 더욱 현저한 일이다. 나라의 구석구석마다 교회가 존재하니 이 또한 놀랍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나 감동시키는 일은 그리 큰 것 같지는 않다. 밤하늘에 붉은 십자가가 넘쳐도 그 붉은 빛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요즘은 밤에 십자가 불을 끄자는 여론이 강하고 교회도 여기에 호응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기라도 아끼고 이웃을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가 그 이유다. 교회가 교리적으로 경쟁하고 자부심을 가져도 내부의 일일뿐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논의의 대상으로 평가하지도 않는다.

교회 주변은 아름답고 도덕적이며 그 안은 사랑이 넘치고 평화롭다. 이론은 그렇지만 이런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교회를 사랑하며 오늘 교회의 모습에 대한 세인들의 평판에 몹시 가슴 아파한다.

창세기 초반부에는 사람들이 추구하고 따라간 몇 몇 길들이 소개되고 있다. 전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런 우리에게 창세기 4장과 6장을 중심으로 계보의 성격과 그 이면을 탐문하는 일은 우리의 갈 길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가인은 범죄 이후 에덴의 동편에 터를 잡았다. 가인은 자식들을 낳고 그 자식들은 새로운 문명과 문화의 창시자가 됐다. 그들은 인간의 창의성을 한껏 뽐낸 성을 쌓고, 사람과 가축을 사고팔며, 예술을 창조하고, 금속 기구를 만들어 냈다. 대단하고 성공적이고 칭송되며 기념될만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성취 이면에는 여호와로부터 떠남, 그리고 라멕에게서 보듯 욕망, 독점, 자기중심성, 억압, 보복 살인이 있었다.

업적과 성취 면에서 찬사의 대상인 그들은 실상은 심판의 대상인 것이다. 아담은 가인 대신 셋을 낳는다. 그리고 셋의 후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은 가인의 후손과는 달리 창의성이나 유능성을 보이지 않았다.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유지했을 것이고 셈의 후손이라는 자부심도 잊지 않았다.

제3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었던바 그들은 생명과 구원의 전달자였다. 성경은 세상에 살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그 사람들은 창시자, 권력자, 기념비적 인물이나 성취자가 아니다. 주변이 어두워도 빛 가운데 모여 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생명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에녹과 노아는 죄악 인간들인 가인의 후손과 같은 환경 속에 살았고 죄악에 물든 셋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여호와의 길을 걷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대교회가 되었다. 교인도 많고 심지어 원조 신앙격인 미국의 신학교에 물질적 지원을 하며 세계 도처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또한 수많은 학생들은 단기선교를 떠나며 많은 성도들이 성지를 순례하는 힘찬 교회가 되었다. 분명히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산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큰 믿음의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거짓 없는 믿음의 사람들 이었다.

성취와 업적을 남긴 사람보다는 섬기고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섬긴 목사님들, 예배당 건설에 자신의 것을 드린 교우들, 매 맞고 집에서 쫓겨나면서도 교회를 다닌 우리 할머니들, 일제와 공산치하에서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신앙의 부모님들, 작은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준 성도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부패하고 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신앙의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어떤 힘을 갖고 있는가. 최고의 학위, 웅장한 건물, 장엄하고 정교한 예배, 신학과 목회의 심도 깊은 전문성일까. 신약성경의 초대 교회도 우리나라의 초대 교회도 그런 경쟁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믿음의 조상들이 가진 것은 세상이 가지지 못한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이었다.

제3의 길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분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찾고 계신다. 주님이 가신 고난의 발자취에서 보듯 그 길은 분명히 괴로운 길이고,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은 법이다. 오늘 우리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 애쓰고 그 길을 가고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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