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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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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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2.0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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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덕 목사 (샬롬교회 협동목사ㆍ경영학 박사)

▲ 이상덕 목사
케이티 데이비스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다 가진 19살짜리 아가씨다. 학급회장, 학교의 퀸카, 공부는 반에서 언제나 1등, 브랜드 신발을 신고,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또래 여자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꽃미남 남자친구도 있고, 게다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부유한 부모님이 미국 테네시 주 네슈빌에 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아가씨는 남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간다 시골마을에서 고아들의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 데이비스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엮어 나가는 아름다운 이야기 가운데 이런 장면이 나온다.

우간다는 내전으로 인해 고아들이 넘치고 있다. 데이비스가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라고 있는 쌍둥이 자매의 집에 들렀다. 쌍둥이 자매의 위로 돈이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3형제가 더 있었다. 할머니는 밤낮으로 일을 하는데도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쌍둥이 자매만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가난에 찌들어 손자들을 위해 고생하고 있는 할머니를 보다 못한 데이비스가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나머지 손자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후원자를 찾아보겠다고 말하자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하나님이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저를 돌봐주시는군요. 오늘 하나님이 내 오랜 기도의 응답으로 아가씨를 보내주셨어요.”

이 말에 데이비스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무더운 아프리카의 태양 아래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시다. 쌍둥이의 할머니를 위해 나를 그곳으로 보내셨을 뿐 아니라 내게 진정한 믿음과 감사의 본을 보여 주시려고 할머니를 만나게 하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울었다. 3개월 치 학비가 20달러, 우리들의 식사 한 끼 값밖에 되지 않는데도 할머니는 온 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오랜 기간 동안 손자들을 위해 무릎 꿇고 간구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감사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나의 기도의 내용이 얼마나 탐욕적이고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경제학에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있다. 한계효용은 소비하는 재화의 마지막 단위가 가지는 효용, 즉 만족도를 말한다. 즉 빵을 두 개 먹으면 두 번째 빵의 효용이 한계효용이고, 세 개를 먹으면 세 번째 빵의 효용이 한계효용이 된다. 그런데 소비의 단위가 많아질수록 이 한계효용은 점점 감소하게 되는데 이것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 한다.

실생활의 예를 들어보자. 나는 신혼초기에 전세 집에서 살았다. 그래서 내 집이 갖고 싶었다. 부지런히 돈을 모아 13평 아파트를 샀다. 아파트를 산 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발걸음도 가볍고 일 할 맛도 났다.

그러나 몇 개월이 못가 그런 감정은 다 사라지고 더 넓은 아파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열심히 모아 그 다음에 23평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번에도 이사한 후 얼마동안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얼마못가 그런 감정은 다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나보다 더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마음에 불만이 쌓이고 더 넓은 집에 대한 욕망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 후 31평, 43평 아파트로 점차 평수를 늘려갔는데 아파트 평수가 커질수록 늘린 평수에 대한 만족감은 적었고 당연히 나는 이런 아파트에 살아야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계효용체감’의 늪에 빠져 산다. 그래서 가진 자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고, 더 좋은 것을 가지고 나서도 더 탐욕스러워진다. 이것은 죄로 인한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성도들이 ‘한계효용체감’의 늪에 빠져있으면 감사의 조건들이 사라지고 기도의 내용이 점점 더 탐욕스러워진다. 주리고 목마를 때는 물 한 그릇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던 마음이 이제는 어지간히 큰 은혜를 받아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때로는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바라보며 불평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욕심이 잉태되어 눈을 가리고 있으니 한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도 단 돈 천 원이 없어 교회식당에서 조차 밥을 먹지 못하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가는 형제자매가 있어도 눈에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고는 자신의 욕망을 더 채우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와 더 큰 기도의 제목을 내어놓고 이루어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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