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설교 시간에 “하나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혹은 “성령님이 저를 강하게 이끄셨습니다” 하는 식의 목사님들 말을 듣는다.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볼 때 목회자들에 비해 아직은 좀 더 순진한(?) 성도들이 가진 콤플렉스를 자극해 목회자의 우월함 내지 특별함을 과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다. 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치고 이런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아, 예수님과 정말로 한 번만 만날 수 있다면, 아니 그분의 목소리를 한 번만 들을 수 있다면 내가 정말로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을 텐데. 그냥 하나님께서 내 눈 앞에 한 번만 나타나셔서 당신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면 난 평생 오로지 주님만 사랑할 자신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마치 자기는 하나님과 매일 손잡고 대화라도 하듯이 소위 ‘주의 종’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신령한 정도를 넘어서 나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특히 큰 교회의 ‘주의 종’은 이성적인 기준에서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해도 그 속에 뭔가 놀라운 뜻이 있을 것이라는 식의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말한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 ‘특별한 종’은 더 이상 없다. 이 부분에서 우리 성도들의 의식이 바로 깨어나는 것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다시금 살아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자 가장 중요한 시작이다. 반복을 통해 형성되는 ‘자기 착각’ 내지 ‘자기 최면’으로 무장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내가 어린 시절 참석했던 집회의 그 목사님처럼 될 수 있다. 조금만 눈 딱 감고 노력하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보, 하나님께서 오늘은 물김치 대신 총각김치를 사라고 하시는군요.”
오늘도 하나님의 특별한 종으로 여겨지는 분들은 무엇보다도 신유 집회와 방언 집회 등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다. 물론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특별한 누군가를 찾는다. 그리고 의지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될 수 없는 바로 그 ‘영웅’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가 내 스스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내 속의 결핍을 보상해주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결핍을 직접 채우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매개체’를 인간 속에서 찾는다.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 병을 낫게 해주신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내 머리에 손을 얹어야 하나님께서 내게 축복을 내리신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의사를 아버지로 둔 아들이 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참 이상하다. 몸이 아플 때마다 아빠한테 그냥 가면 되는데 꼭 아빠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한테 전화를 건다. 그리고 간호사한테 부탁한다.
“간호사 누나, 아빠한테 연락 좀 해주세요. 제가 지금 몸이 좀 안 좋아요.”
이런 아들은 어떤 아들인가? 스스로를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 들어온 종으로 격하하는 비참한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 아들의 모습이 아닌가? 그것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옥성호의 기독교문화를 깨운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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