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세력들, 그리스도교 성장에 걸림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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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세력들, 그리스도교 성장에 걸림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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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0.3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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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14)

                                       그리스도교 이단들 (2세기)

▲ 백석대 역사신학
초기 가톨릭교회 시기인 2세기 중엽에 그리스도교의 존폐를 위협했던 잘 알려진 이단들로 영지주의와 마르키온주의 그리고 몬타누스운동을 들 수 있다. 즉, 그리스도교의 성장과 더불어 혼합주의 종교공동체나 혹은 사변적인 종교철학으로의 발전가능성이 영지주의 이단을 낳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예언의 은사가 약화되면서 ‘새 예언운동’으로 복고적인 몬타누스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예언운동은 당시 보편교회인 대교회와 갈등을 가져왔고 기원 후 200년이 넘어서면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또한 마르키온은 영지주의로 분류되어왔으나 현대학자들에 의하여 영지주의와 구별하여 교회의 개혁을 시도했던 혁신적인 재고로 이룬 이단으로 분류하였다.

영지주의는 일치된 유형을 제시하기 어렵다. 혼합주의가 영지주의의의 주요한 특징이기 때문 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은 천태만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적인 것에 대하여 경멸하고, 결과적으로 육체의 고난에 대한 신앙적인 의미를 수용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육신의 가르침과 인류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영지주의자들을 연구하기 위한 자료들이 그들의 원 자료들과 반영지주의 교부들의 글들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영지주의자들의 문서들로 ‘요한의 경전 외 성경’, 53 종류의 영지주의자들의 글이 필사된 “낙함마디문서”들의 발견이 있었으나 역시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알려진 반박은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영지주의자들의 문서들을 발굴하게 되면서 연구를 통하여 영지와 영지주의를 구별하게 되었다. 영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노력은 이단이라고 할 수 없지만, 영적인 지식이 여러 사상들과 혼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파괴하는 사상을 형성하게 되고, 교회는 이와 같은 영지주의 사상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이다.

영지주의 사상이 그리스도교의 존폐를 위협하였던 것은 그리스도교가 아직 체계적으로 믿는 바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사변철학사상과 신지학, 신비주의, 페르시아와 인도로부터의 사상들이 혼합되면서 그들의 가르침이 영과 육, 선과 악 등 이원론적으로 발전하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만나면서 학파를 형성하고 학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신학에 앞서 나갔기 때문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익명의 사람들이었고, 수많은 글들을 써서 당대 그리스도교 안에서 명성을 얻고 있던 이름들을 필자로 가필하여 회자시킴으로써 일시적으로 큰 호응을 받아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처음 교부들인 이레나이우스, 힙폴리투스, 테르툴리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은 이들과 힘써 싸워야만 했다.

마르키온은 흑해 연안 지노페에서 태어났다. 해운업을 하면서 자신의 배를 타고 항해하며 닿는 항구마다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였는데, 항구 도시 서머나에서 사도 요한의 제자이었던 폴리카르포스를 만나면서 그의 개혁사상이 반박되었다. 폴리카르포스는 마르키온을 “사탄이 첫 번째 낳은 자”라고 비난하였다. 결과로 마르키온은 140년경에 소아시아지역을 떠나 로마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그의 가르침이 문제되어 로마교회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마르키온은 구약을 폐지하고, 명목상의 바울의 가르침의 추종자가 되어 그 밖에 저자들이 쓴 신약성경의 책들을 제외시켰다. 그의 개혁은 시종일관 “한 분 공의의 하나님이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 일 수 없다”는 교리적인 출발점에서 숙고되었다. 그리고 그의 윤리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역사의 현장은 악한 하나님(구약, 데미우르고스)과 낯선 하나님(신약) 사이의 싸움터이다. 그는 세상에 사랑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헌신적인 포기와 극단적인 금욕의 삶을 요구하였다.

170년경에 일어난 몬타누스운동은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언과 유대묵시문학적인 종말론의 소생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사도요한의 계시록의 영향으로 구약의 종말론적인 평화의 왕국에 대한 천년왕국 사상이 몬타누스와 여자 예언자들 막시밀라와 프리스가의 예언에 접목되면서 소아시아지역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막시밀라의 시한부 종말론도 나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하여 결혼을 폐지하고, 금식을 강화하고, 순교를 갈망하게 하고, 공동체로부터 죄인들을 골라내었다. 이들은 지나친 엄숙주의와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직제인 군주적 감독직을 거부함으로써 기원 후 200년을 넘어서면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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