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거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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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6.0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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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신학 이야기 (28)

세상의 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로마서 12장 17절부터 보면 “아무에게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했다.
신명기 32장 35절에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라고 했다.

성경은 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서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아무런 권한을 주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함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처리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할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할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눌 것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후히 주시고 누르고 흔들어서 주신다는 것은 내가 감당할 만큼 만 주시는데 사람의 곳간에 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이 주시면 많이 먹고 마실 것을 보급해야 할 의무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성령 받은 공동체적 삶의 가치다.

왜 사람들이 사람을 비판하고 무시하는가? 그리고 원수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정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극단적인 이방종교에 젖어있다는 증거다. 내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안에서 자신이 사랑과 평화를 느낄 뿐이다. 나아가 세상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 목적도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평화로다”라고 했다. 우리가 순간마다 외우며 고백하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머리와 지체로 본 에베소서의 기록이 한 몸으로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증명하고 있다.

지체의 존재가 머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이상 거론하고 따질 이유가 없는 매우 중요한 체험적 표현이다. 이 귀중한 공식이요, 원리를 알기 때문에 의욕을 잃지 않는 것은 테레사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나는 무리를 보지 않다. 오직 개인만 볼 뿐이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한 사람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에 딱 한 사람만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아주 쉬운 일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일이다. 언제나 한 알의 밀알이다. 내 앞에 나를 보고 있는 그 사람이다. 분명히 내가 먹고 마시는 만큼 함께 할 수 있다. 교회도 그리고 교회부흥도 개인의 한 사람 바로 내 앞에 보이는 그 한 사람이면 된다.

마귀는 많은 무리를 보여주고 우리가 박수갈채의 꿈을 갖게 한다. 이것은 환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순수하고 아주 쉽고 매우 작은 일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많은 무리란 마귀의 숫자일 수 있다.
마틴 루터킹도 의욕을 잃지 않는 이유를 “오직 한 사람이 작은 그리스도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과 평화안에 거하면 그 사랑과 평화가 그들의 일상 속으로 흘러 넘쳐 결국 온 세상이 변하는 것이다.

많은 무리나 많은 성과는 마귀의 바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극소수를 무시하고 큰 것, 거창한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것은 아니다. 창조주이신 분은 너희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신다. 전능자이신 내가 있기 때문이다. 지체만 덩치가 커 버리면 정박아일 수 있다. 지식의 기능이 약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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