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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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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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6.0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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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찬 목사 (예따람 예배공동체)

장미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오래된 골목길을 걸으면 담장 가득히 붉은 색으로 수놓은 넝쿨 장미꽃을 만날 수 있다. 꽃 중의 꽃이라는 장미의 화려함이 자꾸만 눈길을 끈다. 장미꽃의 아름다움 바로 그 곁에 가시가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만 이끌려 덥석 꺾으려 손을 내밀다가는 뾰족한 가시에 손가락을 찔리게 된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좋은 것 곁에는 좋지 않은 것도 늘 함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조심하는 것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수행과 수련으로 거룩을 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아 홍수 시대 이야기이다. 탈무드에도 있다. 홍수 심판이 다가오자, 하나님께서 노아 방주로 생물들을 짝을 지어 보내셨다. 노아는 몰려오는 생물들을 일일이 살피면서 암수 한 쌍씩 방주에 들였다.

그런데 ‘선(善)’이 혼자 방주로 들어가려 했다. 노아는 가로막고 하나님께서 방주에는 짝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며, 짝을 구해오라 했다. 선은 짝을 찾으러 다니다가 어둠 속에서 외톨이 된 ‘악(惡)’을 발견하고 데려와, 노아 방주로 함께 들어가 생명을 구했다.

이후에 선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악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마치 장미꽃에 가시가 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보면 세상에는 짝이 된 것이 많고 많다. 선과 악 외에도 빛과 그림자, 위와 아래, 넓음과 좁음, 깊음과 얕음, 높음과 낮음, 바름과 그름, 좋음과 나쁨, 오목과 볼록, 빠름과 늦음, 밝음과 어둠, 큼과 작음, 많음과 적음, 맑음과 탁함, 아름다움과 추함 등 서로 상반되는 가치가 서로 얽혀 존재하는 곳이 이 세상이다. 한 마디로 공존(共存)의 세상이다. 이것들은 만날 수 없이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안에 늘 함께 있다.

그래서 바울은 탄식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19, 21)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5월 28일은 석가탄신일이었다. 그런데 우울한 석탄일이 되었다. 스님들의 도박이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후에 어떤 것들이 감추어져 있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단지 걱정하는 것은 불자들의 실망하는 소리가 온 나라의 절마다 넘치고 있는 현상이다.

그 동안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온 기독교인들은 이 사건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개독교’라고 공격받아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상대적으로 시원해졌을까?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성직자로 인해 부끄러움으로 괴로웠던 것이 보상받는 마음이었을까? 타 종교라고 별 수 없구나 라는 자조 섞인 실망만 증폭된 것은 아닐까?

왜 성직자의 노름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것일까? 따지고 보면, 불자들이나 신자들도 일상 속에서 즐기는 일 중 하나다. 그런대도 성직자들의 노름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인 이유는 무엇일까? 성직자에게 자신들과 다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똥도 누지 않을 것이라는 신화가 있어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거룩성이다. 거룩의 신비가 없어지면, 그 순간 끝이다. 종교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성직에 대한 존경도 소멸된다.

성직이 무엇인가? 모두가 가는 길을 걷지 않기로 한 사람의 길이다. 성(聖)과 속(俗)을 분별하여, 성에 속하겠다고 나선 이가 성직자이다. 스님은 머리를 깎고 신부는 독신서원을 한다. 목사는 수행과 수련과 자기성찰로 거룩을 품어야 한다.

성직은 굴레이다. 굴레를 쓰지 않으려면, 성직을 가져선 안 된다. 스님들의 도박이 남의 일이 아니기에 쓴 소리 한 마디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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