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목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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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목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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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4.2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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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신학 이야기 (23)

지금껏 살아본 사람들이 목적대로 살았는가 물어보자.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에 시달렸는가. 성과에 대한 치수가 나를 계속 본질의 자리를 벗어나게 함을 느끼면서도 포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려면 목적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람들에게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논리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타고 났다. 누구나 타고난 일에는 놀라운 재능이 있으므로 그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타고난 일을 하면 대단한 사람이 되고 세상의 주목과 찬사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찬사와 갈채를 받기 위해서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줄 사람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인간의 최대의 꿈을 이루었을 때의 종말은 어떻게 되는가? 결국 그런 사람의 대다수를 세상이라는 괴물이 집어 삼킨다. 그 꿈의 실현은 결국 괴물의 수작이요, 나 자신을 큰 덩치로 삼켜 버리려고 세상의 꿈을 갖게 한 것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여자는 평생 무엇을 하고 살아야한다는 미래관이 없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의 삶이었다. 인생의 목적은 이미 나와 있는데 우리는 광야를 헤매는 허송세월을 보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 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다”라고 했다.

시간 맞춰서 기도하는 사람보다 그들의 행동 자체에서 신앙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자유로움이다. 자기 직업을 삶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직업에 충실할 때 그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땀을 흘리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밀림 속에서 악어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고백을 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 그것이 인생의 목적에 의한 밀려남이 아니라 그 자체 속에서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종교적 행위가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다.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보기도가 아니다. 그 중보의 내용이 삶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기도이고 생활이다. 내가 대신해서 상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이방종교인 로마 가톨릭의 대신 중재역할이다. 이것이 대제사장 제도로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제사의 개념을 지금도 계속 반복하는 죄악의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

시편 37편 4절을 보면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신다”고 했다. 하나님을 아는 기쁨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목적은 결국 세속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의 일은 지극히 기본적이다.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그 일상이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 2절부터 3절에서 “어른들은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의 일은 아주 단순합니다”라고 했다.

하나님을 알게 됨의 증거는 사람들 간의 갈증이 시원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다. 인간의 목적을 놓아버리면 자유함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너무 단순함에 대한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론이나 생각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며 가까운데 계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권위이시지만 너무 단순하시고 편하신 분으로 격식이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모든 복잡한 격식은 이방종교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의 통로인 것이다. 나의 주변 모두에게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다. 늘 하나님에 관하여 배워가는 삶이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삶이 하나님의 통일된 현실인 것이다.

로마서 11장 36절에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라고 했다. 사도행전 17장 26장에서 28절에서는 그 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위에 살게 하시고 그들이 사는 시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계신 것이다.

물고기가 바다에 있듯 주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무소부재하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이론이 아니라 바로 내 주변 모든 것이 거룩한 흐름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신다. 그러기에 그 분의 임재는 어디서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 로마서 12장 1절에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다. 이것이 드리는 합당한 예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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