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얽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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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얽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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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4.1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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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신학 이야기 (22)

마태복음 25장 35절부터 36절까지를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말했다.

37절부터 39절에는 “언제 그랬느냐”, 45절에서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이슬람교는 연민을 가르칩니다. 마호메트는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절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한다. 코란에 의는 그 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친척과 고아, 가난한 자, 나그네, 거지에게 그리고 포로들의 해방을 위해 재산을 나눠주는 것이다.

석가모니도 연민을 베풀면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도 미래의 힌두교는 힌두교 유산을 잘 보존하는 동시에 적극적이고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헌신해야 한다. 유대교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정의를 강조한다.

이들 모두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와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모든 일에 사랑을 강조했다. 어거스틴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서는 의견의 차이를 딛고 힘을 합치라고 했다. 종교의 틀에 얽매인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하지만 그들의 일치를 빌미로 자신의 교리를 강요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기를 거부한다.

칼빈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특징도 칼빈의 주장에 얽매여서 이론 형성이 안 되는 것을 거부한다. 신학교리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본질이라는 중요한 일을 종교라는 안경을 통한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독교라는 명분으로 또 하나의 고상한 이단을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지금 다른 사람이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곧 틀이요, 이단성의 본성인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실체요, 소망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누구도 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입은 사람들 모두가 그 분의 형상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마더 테레사나 마틴 루터 킹이나 간디가 보여준 것은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내재한 매우 보편적인 틀을 벗어난 반응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요한일서 4장 7절부터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는 소박한 말이다. 거기에 나의 존재가치나 성공을 위한 비전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분출이다.

그러나 종교집단은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급급한 조급함에서 영적 정체성을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현실적인 시급한 사건일수록 기도하겠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그것이 신앙적 표현인 것처럼 남용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현실도피성인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힌다. 사실상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은 미래 지향이 아니라 지금 부딪혀진 상황이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위선적 행위가 기도하자는 것이다.

즉 중보기도는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겠다는 것이다. 믿음은 미래가 아니다. 믿음은 현장이다.누가복음 6장 31절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면 누군가가 먹을 것을 주면 되는 것인데 거기에서 기도하겠다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 속담에 “수저하나 더 놓으면 된다”라는 말이 있다.

목말라 죽을 지경이라면 물을 주는 일이 신앙이다. 압제자의 학대를 받고 있다면 압제에서의 해방이다. 질병으로 죽어간다면 치료를 받고 싶은 것이다. 스스로 살아가기 어렵다면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람의 가치는 그의 신학이 얼마나 옳으냐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이 보시는 초점은 사람의 가치가 그의 학문성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너희 각 개인의 마음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학적 이론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위이기 때문이다.

마더 테레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 쉽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정말 쉬운 것이다” 성경에는 “구제를 하되 먼저 믿는 자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나의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을 아는 일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굶주린 사람에게 쌀 한 되를 건네기는 쉬워도 같은 집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외로움과 고통을 덜어주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이생의 자랑이란 공해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명분 때문에 이웃을 사랑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사랑을 나누기 전에 먼저 가정 안에서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사랑은 거창한 표어가 아니다. 거창한 비전이나 계획이 아니라 너의 그늘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먼저 가장 가까운 나의 그늘에 사랑을 받을 사람이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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