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동화] 아바이 순대
상태바
[신년동화] 아바이 순대
  • 운영자
  • 승인 2011.12.29 11: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일러스트=조미례

“너는 내일 세뱃돈 얼마나 받을 것 같니?”
“음…….적어도 빠닥빠닥한 배춧잎 서른 장은 받지 않을까?”
“나도 잘 나가는 삼촌이 갈비짝 사 들고 올 거니까……. 너보다는 많이 받을 걸.”
“우리 세뱃돈 받으면 같이 쇼핑하자. 멋지게! 폼 나게! 쫙 빼 보자고!”

토요 집회에 나온 아이들이 세뱃돈 타령하느라 바빴다. 나는 가만히 앉아 강대상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세뱃돈이니 쇼핑이니 하는 말들이 고향에서 몰래 남한 드라마를 볼 때처럼 그림의 떡일 뿐이다.
  
 “탈북하다 걸리면 본인은 물론 3대를 멸종 시킬 것이다.”

지난 밤, 김정일의 후계자인 김정은이 내렸다는 명령을 들으며 엄마와 나는 밤잠을 설쳤다. 나는 아빠 생각에 입술이 바삭바삭 타들어 가는데 아이들은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괜히 교회에 온 것 같다.
 나는 왠지 나처럼 외로워 보이는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외쳤다. 

 ‘당신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제발 우리 아빠 좀 지켜 주세요.’

솔직히 믿어지지는 않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빌었다. 엄마는 아빠를 데려 다 준다는 전문 브로커에게 은밀히 꽤 많은 돈을 준 상태다. 그런데 이토록 국경선 일대가 살얼음판이라니…….  
  “넌, 벙어리니? 한 마디도 않잖아. 참. 북한에서도 설날 세뱃돈 같은 거 받니? 혹시 보리쌀 한 컵…….옥수수 한 되 뭐 이런 걸로 대신하는 거 아냐? 하하 호호”
 “난 쟤가 북한에서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북한에서 살던 애들은 모두 꽃제비처럼 너덜너덜 거지일 줄 알았는데. 근데 우리와 똑같잖아. 이상하지 않니? 얘들아. 낄낄낄…….”
 중등부에 다닌 지 거의 일 년이 되어 가는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나를 이방인 취급이다. 나는 교회에 나오면 더욱 내 자신이 초라해 보여서 싫다. 그래도 엄마 때문에 집회에 빠질 수는 없다.  
아이들은 전도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었어도 천장 속의 쥐새끼들처럼 연신 속닥거렸다. 나는 너무 심하다 싶어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이 일제히 날 노려보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나는 아이들이 예배가 끝나면 또 시비를 걸 것 같아 살며시 예배당을 빠져 나왔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뭔가 찜찜했다. 매캐한 먼지를 온몸으로 뒤집어 쓴 것처럼 씁쓸했다.  거리에는 설날 특별 세일을 알리는 광고로 요란하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들이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보니 설날이 코앞인 게 실감난다. 그런데 왜 난 이렇게 마음이 추운 거지.

열쇠로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니 멍구가 좋아 죽겠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멍구를 보자 아이들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싸악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멍구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공중제비를 시켜 줬다. 멍구의 얼굴이 은빛 사막에 비친 햇살처럼 빛났다. 멍구는 우리 집 앞 골목에서 오랫동안 배회하던 절름발이 강아지다. 제멋대로 엉겨 붙은 털과 온갖 세상의 모든 때를 다 묻힌 듯 더러운 몰골로 보아 버려진 게 분명했다. 엄마를 만나러 국경선 일대를 헤매고 다닐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쭈그리고 있던 푸들이 나만 보면 주인을 만난 듯 반기는 걸 내칠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야단맞을 각오로 집으로 데려 와 정성스레 목욕을 시켰다. 잘록잘록. 멍구가 한 쪽 다리를 절며 걷는 모습도 지금의 내 처지와 닮은 것 같아 짠했다. 
내가 드라이로 강아지 털을 말리는데 엄마가 들어왔다. 강아지를 보면 엄청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엄마는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모진 고생 끝에 인천공항에 내린 나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반가워하던 모습이었다. 엄마도 나처럼 외로웠나 보다.  

 “주인 있는 개면 찾아 줘야지. 여기는 강아지를 자식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세상이야.”
 “아냐, 엄마. 이 강아지 한 달도 더 넘게 우리 동네 배회하는 거 내가 봤어. 분명히 누군가 버린 걸 거야.”
 “쯧쯧, 네가 혼자 얼마나 외로웠으면 버려진 강아지를 데려 왔겠니. 동생처럼 잘 씻기고 먹여야 된다. 개털 날리는 것도 수시로 치워야 하고…….”
 “우리 엄마. 역시 최고!”

멍구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가 많았다. 실은 나도 멍하니 앉아 있다 엄마한테 정신 줄 놓고 있다고 혼날 때가 많다. 멍구도 나처럼 그리운 가족 생각하느라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걸까?  그래선지 나는 점점 더 멍구가 친동생처럼 느껴진다.  
  “멍구야, 아직 엄마 안 왔네. 혼자 노느라 심심했지?”
나는 멍구를 땅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멍구가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큰 눈을 껌벅였다. 나는 멍구에게 예쁜 분홍 플라스틱 그릇에 사료를 듬뿍 담아 주었다. 배가 고팠는지 멍구는 순식간에 그릇을 비운 후 내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더 달라는 뜻이다. 두만강을 넘어 연길 지하 교회에 갔을 때 쌀밥을 처음 먹어 보았다. (북에서는 생일 때도 쌀밥을 못 먹었다.) 한 그릇을 먹고도 양이 차지 않았다. 나도 지금 내 앞의 멍구처럼 간절한 눈빛으로 사람들에게 밥그릇을 내밀었다. 지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배불리 먹던 날의 기쁨이란…….  

 나는 멍구의 밥그릇에 잔뜩 사료를 넣어주며 답답한 내 마음을 풀어 놓았다.
 “멍구야, 우리 아빠도 지금 어딘가를 헤매다 배고파 지쳐 쓰러졌을지도 몰라…….한 달 전에 도강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지금은 깜깜 무소식이야. 지금 국경선 일대 경비가 엄청 살벌하다는데…….넘어오다 총살이라도 당하면 어쩌니. 나 혼자 온 게 잘못이었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아 살아야 하는데.”
 나는 멍구가 내 말을 듣고 있는 줄 알고 떠들었다. 그런데 멍구는 현관문 앞으로 가 꼬리를 흔들며 킁, 킁 대느라 정신없었다. 엄마였다. 엄마가 양손에 무엇인가를 잔뜩 들고 들어왔다. 멍구가 엄마 곁을 뱅뱅 돌자, 엄마가 짐을 놓고 멍구를 가슴에 폭 안아 주었다. 

엄마는 냉장고를 열고 식당에서 얻어 온 밑반찬이며 야채들을 집어넣었다. 
 “몸도 힘들고 탈북자라고 조선족보다 대우는 안 해 줘도…….주인이 이렇게 싱싱한 음식들이라도 챙겨 가게 하니 고맙지.”
중국에서부터 오랫동안 식당 일을 해 왔고 음식 솜씨도 좋지만 엄마는 절대 주방 일을 맡을 수 없단다. 탈북자라 믿을 수 없다는 게 이유란다. 그래도 아빠를 데려 올 때까지는 어떤 일 앞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근심 걱정이 없는 얼굴이다. 나는 두만강을 건널 때 내 어깨에 짊어진 보따리처럼 늘 마음이 무거운데 엄마는 달랐다. 엄마 입에서는 노래가 떠날 날이 없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때로는 야속해서 따지곤 했다.
 “엄마는 아빠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노래가 나와? 혹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남한 아저씨들과 재혼할 생각이 있는 거 아냐?”
실제로 내가 다니고 있는 탈북 대안학교에는 남한에 내려와서 새 아빠가 생긴 아이들이 많다. 북한에 버젓이 아빠가 살아있는데도 말이다. 친구들이 새로 생긴 아빠와 동생 때문에 고민하는 걸 보면 나도 은근히 걱정이 되던 차였다.

“명희야. 나도 너만큼 아빠가 그리워. 마음도 힘들고. 그러나 엄마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는단다. 생각해 봐. 우리가 북한에서 살 때 지금의 생활을 상상이나 했었니? 국경 지대에서부터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전도사님을 만날 줄 알았냐고? 엄마는 믿는다. 아빠도 분명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실 거라고. 지금 엄마가 부르는 건 노래가 아닌 찬양이야. 찬양을 부르다 보면 힘이 생기구….”
 “나는 엄마처럼 쉽게 믿을 수가 없어. 솔직히 어버이 수령님을 외치던 입술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구. 전도사님이 생명의 은인이라는 건 고맙지만 하나님이 믿어지지는 않아. 엄마…….”

엄마는 북에서부터 뭔가 다르긴 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동산처럼 쌓여 있을 때도 엄마는 담담했다. 마을 사람들은 맥없이 장군님만 찾았지만 엄마는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엄마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 힘을 믿는 것 같았다.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깊은 밤이었다. 엄마는 내게 아빠 잘 모시고 있으면 반드시 데리러 온다는 약속과 함께 홀로 떠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이미 지하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그 후로 엄마는 중국에서, 신장이 나빠 일도 못하고 누워 있는 아빠의 약값과 생활비 등을 몰래 보내 주었다. 엄마가 보낸 신문지 안에는 늘 쪽지가 들어 있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지키실 거다.”

나는 삐뚜름하게 쓴 쪽지 글을 읽자마자 성냥을 그어 태워 버렸다. 만약에 보위대에게 걸리면 하나님이라는 말만으로도 총살 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쨌든 엄마가 믿는 하나님 덕분인지 운이 좋아서인지 나는 한국에 먼저 와 자리를 마련한 엄마를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하나님과  내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보고 싶은 아빠를 만나게 해 주면 하나님을 믿겠노라는. 

 “엄마, 근데 아직도 연락책 아저씨한테는 연락이 없는 거야? 혹시 그 브로커 아저씨 사기꾼 아냐? 돈만 떼어 먹고 아빠한테는 아무런 조치도 않는지도 모르잖아.”
 냉장고 정리를 끝낸 뒤, 야채를 다듬느라 바쁜 엄마에게 따지듯 물었다. 하긴 엄마도 연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속이 타는 건 마찬가지 인 듯싶다.
 “그렇지 않아. 우릴 여기까지 데려다 주신 전도사님이 연결해 주신 분인데…….그럴 리 없어. 하지만 요즘 워낙 탈북자를 막기 위해 감시가 심하다니까…….그게 문제지. 그래도 우린 기적을 믿어야 해.”
 가슴 속에서 철렁, 하고 쇳소리가 났다. 내 얼굴이 하얘지는 걸 보며 엄마는 애써 달랬다.

 “분명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엄마도 실은 몹시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요 며칠 새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더 불안하다.
 “우리 순대나 만들어 먹을까. 설날이라고 우리 딸 세뱃돈도 많이 못 주고 맛있는 것도 못해 주는데…….이 김에 전도사님께 북한식 순대 좀 만들어 드려야겠다. 전도사님 아니면 너조차도 못 만났을 텐데. 그 고마움은 잊지 말아야지.”
 “느이 아빠가 정말 순대 좋아했는데…….”

엄마는 혼잣말을 흘리며 냉장고에서 미리 준비 해 놓은 아바이 순대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북에서는 설날이라고 특별 음식을 해 먹는 일이 없었다. 돼지고기 배급이 조금 나올 때가 있었을 뿐. 돼지고기가 나오면 엄마는 장마당에 가서 돼지 창자를 사다 밤새 물에 담갔다가 새벽이면 일어나 속을 말갛게 씻은 뒤, 그 안에 넣을 속을 준비했다. 감자 가루를 묻힌 창자에 속을 잔뜩 집어넣어 쪄 낸 순대는 정말 맛이 독특했다. 늘 시름시름 앓던 아빠도 아바이 순대만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엄마는 어쩌면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순대를 만드는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돼지 창자 구하기가 힘들단다. 우시장에 가면 구하겠지만. 엄마가 시간도 없고. 대신 싱싱한 오징어로 하자.”
 문어만큼 큰 오징어를 깨끗이 손질한 다음, 엄마는 정성스레 속을 집어넣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 가족 모두 모여 아바이 순대를 먹던 때가 꿈만 같다. 그런 세월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내년에는 느이 아빠와 같이 저 식탁에서 아바이 순대 먹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한숨 소리에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아빠의 얼굴을 생각하며 순대 속을 꽉 꽉 채웠다. 아이들처럼 배춧잎 그려진 세뱃돈 못 받아도 좋으니 제발 아빠가 살아 있다는 소식만이라도 듣기를 바라면서. 

멍구는 갑자기 집안에서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서인지 폴짝 폴짝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엄마는 잘 만든 순대를 찜통에 넣으면서도 연신 시계와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찜통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아올랐다. 엄마가 맛보기로 꺼낸 순대가 먹음직스러웠다. 텔레비전에서는 60년 만에 찾아온다는 흑룡과 해돋이에 대한 이야기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동해 바다로 해돋이 구경을 떠나는 사람들의 밝은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 때였다. 엄마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 것은,
나도 모르게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명희야, 아빠가 다행히 두만강을 건너셨단다. 김정일 죽기 전에 연변에 들어왔는데 워낙 감시가 심해서 이제야 브로커 아저씨와 연락이 닿았다는 구나. 하나님이 또 기적을 이루신 거야. 감사합니다.”
  엄마가 울먹이며 말했다. 눈물을 훔치는 엄마의 얼굴에 막 쪄 낸 아바이 순대에서 솟아오르는 김처럼 웃음꽃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제가 졌어요! 우리 아빠 지켜 주셔서 감사해요. 하. 나. 님. 아. 버. 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불러 보았다. 이상하게 가슴이 따뜻해졌다. 북에 계신 아빠를 부를 때처럼 말이다. 나는 엄마가 정성스레 담아 놓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바이 순대를 들고 예배당을 향해 달렸다. 멍구도 절룩거리며 내 뒤를 따랐다.

 

박경희 소설가

* 2006년 한국프로듀서 연합회가 수여하는 라디오부문 한국방송작가상 수상
*  극동방송 구성작가로 18년간 <김혜자와 차 한잔을> 원고 집필.
*  현재는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 ‘하늘꿈 학교’에서 글쓰기 지도

저서 <여자나이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 에세이집, 
        <이대로 감사합니다> 기도 시집, 
        <분홍벽돌집> 청소년 소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