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특집] “북한에도 성탄의 복된 소식이 전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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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특집] “북한에도 성탄의 복된 소식이 전해지기를….”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1.12.21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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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김영남ㆍ박문희 씨 “신앙의 자유가 그리웠다”

“우리는 양식이 없어서 굶어죽는데….”

김영남 씨(38)가 북한을 탈출한 것은 1998년 4월이었다. 북한에서 말하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절정에 다다를 때였다. 김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함경북도 연사군 철도역에서 근무했다. 그가 탈북할 당시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으로 인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갔다.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관을 짤 나무가 없었고, 거적때기로 대충 덮거나 가마니에 싸서 버려진 시체가 거리에 널려있었다.

그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김 씨는 “양식이 없어서 굶어죽은 사람이 300만에 이를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기차 안에서 죽었고, 철도역사 안에서도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했다”고 회상했다. 그 때 그는 한 중국인이 지나가는 말로 “우리는 쌀이 남아돈다”고 했던 말을 귀담아 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중국에 다녀온 후 실제로 농지에 빽빽이 들어찬 곡식들을 본 후 생각이 변했다. 왜 같은 풍토와 기후에서 농사를 짓는데 북한은 이렇게 피폐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당시 나이 24살이었던 그는 가족들을 두고 홀로 북한을 탈출했다. 그는 중국에서 건설노동자 일도 했고, 농촌에서 소나 닭을 키우기도 했다.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만큼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탈북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공안들에게 잡히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지 감시를 피해야 했습니다.”

그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려 해도 보상금을 노리는 사람들 때문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가장 가깝다고 여겼던 사람들에게도 수차례 신고를 당하기도 했고 실제로 잡혔다가 도망치기도 했다. 사실 그는 남한에 올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부모와 형제, 고향 소식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계속 거부했다고 한다. 이처럼 유랑하던 그를 붙잡은 것은 중국 심양의 조선족 교회의 한 집사였다. 이 집사는 어려운 형편에 있던 그를 헌신적으로 도왔다.

“이 집사님은 도움을 줄때마다 항상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를 도와준다’고 말했어요. 그곳을 떠날 때도 집사님은 중국돈으로 70원을 주시며 ‘어디에 가든지 교회로 들어가라’고 했어요. 어려운 상황에서 들었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두 번째 찾은 교회에서도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를 도와 준다”는 말을 또 듣게 됐다.

“그때부터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고, 신앙을 갖게 됐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기도하라던 집사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던 중 그는 한국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북경에서 내몽골을 지나 몽골 경비대에 붙잡혔다. 그리고 울란바토르 한국대사관에 넘겨져 2005년 남한에 들어왔다.

김영남 씨는 현재 한국입체교육정보원 사업팀 팀장을 맡고 있다. 남한 사회에 와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공부였다.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던 그는 지금 탈북자들에게 IT교육, 자격증 교육 등을 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이날 처음 만난 박문희 씨가 컴퓨터를 잘할 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여기에 와서 배우라. 탈북자들이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한국 사회에서 탈북자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직업에 대해 그는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함께 만난 박문희 씨(66)도 험난한 시절을 보내기는 마찬가지다. 올해 초 남한에 온 그는 5월에 하나원에서 나와 9월부터 북한선교전문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김 씨와 마찬가지로 1998년 탈북해 중국에서 붙잡혀 13년 동안 2차례나 북한으로 송환됐다. 그리고 3년 동안이나 교화소에서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다. 중국에서도 쫓겨 다니면서 눈물겹게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박문희 씨는 현재 북한선교전문대학원에 다니면서 전도사로 살아가고 있다. 박 씨는 “한국에 살기 위해서 왔다. 인권도 자유도 그리웠지만 신앙의 자유가 가장 그리웠다”며 “지옥과 같은 교화소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하고 싶었다. 자유로운 한국에 와서 신앙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박 씨는 10여년 만에 가족들과 함께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다고 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성탄절을 모르는 북한 주민들이 생각나 안타깝다고 전했다.

“하루 속히 통일이 이뤄져서 북한의 주민들도 즐겁고 떳떳하게 성탄절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김영남 씨는 지난 2009년부터 북에 있는 가족들과 소식이 단절됐다. 이번 성탄절에도 소식을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워했다. 김 씨는 “북한을 생각하면 눈물 밖에 나지 않는다. 이 땅은 배불러서 다이어트를 하는데, 반대편에는 여전히 못 먹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온 박문희 씨는 “2만 명의 탈북자들이 대부분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며 “이번 성탄절에는 한반도가 복음으로 통일될 것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에 복음의 문이 열리면 다시 들어가기 위해 하루하루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탈북자들은 분명 한국 사회의 베들레헴에 위치하고 있었다. 같은 민족이지만 낯선 땅 남한에서 새롭게 뿌리내리고 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북한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여기에서 겪는 고통이나 불만은 정말 사치스럽게 느껴진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한국의 마지막 베들레헴 북한에서도 예수가 필요하다.

지난 토요일 아침 북한 김정일이 사망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이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이틀이 지난 19일 세상에 알려졌다.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지 2천년이 훌쩍 넘었다. “이 복된 소식을 북한에 전해야 한다”고 말하던 탈북자들의 간절한 호소가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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