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41강) 왜 주님은 침을 사용하시며 병자를 고치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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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41강) 왜 주님은 침을 사용하시며 병자를 고치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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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8.2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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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 먹고 말 더듬는 장애인의 치유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치유 사건 이후 등장하는 장애인 치유 사건(막 7:31-37)은 다음 장에 나오는 맹인의 치유 사건(막 8:22-26)과 함께 오직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특별한 자료이다.

대부분의 마가의 자료들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등장하고 있지만, 오직 이 두 개의 기적사건은 마가복음에만 소개되어 있다.

이는 마태, 누가복음과는 달리 행동적 복음으로서 마가복음의 특징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치유 사건들은 주님을 통하여 이사야에 예언된 메시아 시대가 성취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풀이된다.

주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신 후 두로에서 나오셔서 북쪽으로 올라가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한 다음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막 7:31).

이런 여정은 직선 루트가 아니라, 북쪽 지경을 경유하여 빙 둘러 돌아오는 우회 루트이다.

그리하여 어떤 비판적인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주님의 여행경로를 이렇게 마가복음의 저자가 기록한 것은 팔레스타인의 지리에 무지했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그는 예루살렘 출신의 요한 마가일 수 없다고 지적하며, 마가복음 저작설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출신으로서 마가가 갈릴리와 그 윗 지방의 지리를 잘 모를 수도 있을 것이기에 이것이 마가의 저작권을 부인할만한 직접적 근거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에 이러한 루트는 전혀 불가능한 경로가 아니었다.

사실 여기서 주님이 시돈을 지나셨다는 표현은 시돈 성 안으로 친히 들어가셨다기보다는 시돈 지방을 경유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하튼 여기서 마가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이 북쪽 지방을 여행하는 동안 이방인 지역을 통과하셨고, 또 이방인 지역에 머무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마가 당대의 이방인 선교를 정당화하려는 저자의 의도로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장차 이방인들의 귀가 열려 복음을 듣고, 그들의 입이 열려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장래의 사건을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을 끄는 대목은 주님이 치유를 위해 침(saliva)을 사용하신 것이다. 물론 마가복음 8장의 맹인 치유 사건에서도 주님은 다시 침을 사용하신다(막 8:23).

일반적으로 침은 고대 이방 세계에서 치유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특히 성인(聖人)의 침은 더욱 그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가는 주님이 이방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장애인들의 문제를 치유하신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맹인 바디매오의 경우(막 10:46-52)에는 침을 사용하시지 않고 안수도 하지 않으신 상태에서 오직 말씀만으로 그를 치유한 것으로 고려할 때, 침이란 한낱 이방인들에게 익숙하게 보이는 방법일 뿐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능력인 것으로 또한 마가는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후대 복음서인 마태,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이 침을 사용하셨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이는 아마도 침의 사용이 주님을 평범한 당대의 마술적 치유자로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주님이 그 장애인을 치유하시는 방법이다. “…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대시며 …” (33절). 그리고 마가복음 8장의 맹인 치유에서도 이런 행동은 반복되어 나타난다. “…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 (막 8:23).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뱉아 혀 혹은 눈에 대시는 것은 얼핏 원시적인 행동으로 보이는데, 왜 주님은 이렇게 행동하셨을까?

침이나 안수 없이도 얼마든지 말씀만으로도 고치실 수 있으신데 이렇게 행동하신 것은 장애인이 고통당하고 있는 부위에 친히 손을 대심으로써 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병자의 아픔을 함께 느끼시고자 하는 주님의 긍휼하심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여기서 “동정”(sympatheo)의 의미는 suffer with, 즉 함께 고통 받는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고통을 외면하시지 않고 함께 아파하시며 마침내 치유하여 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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