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35강)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함께 추구해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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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35강)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함께 추구해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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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7.0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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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막 6:31-44)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유일한 기사(記事)이다(마 14:13-21; 눅 9:10-17; 요 6:1-14). 이외에 마가와 마태복음에서는 사천 명 급식(給食) 사건도 등장한다(막 8:1-10; 마 15:32-39). 모두 여섯 번에 걸친 사건의 기록은 초대교회가 이 사건을 얼마나 중요하게 간주하였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기적은 주님께서 인간의 필요에 깊은 동정을 가지신 분으로서, 인간의 자원이 모두 고갈되었을 때 그 필요를 제공해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자연세계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다. 아울러 모든 복음서기자들은 이 급식 기적을 주님이 장차 제정하실 성만찬의 예표(preview)이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실현될 때 열릴 메시아 잔치의 예표로서 간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의 오병이어 기적에서 우리는 몇 가지 마가복음만의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약간의 긴 서론(31-34절)과 이 사건의 의미를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언급(막 6:52; 8:17-21)은 마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특별히 마가는 이 사건이 ‘한적한 곳’(31-32절; 35절 = ‘빈들’)에서 발생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에레모스(eremos)란 단어는 ‘광야’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하며, 영어성경(NIV)에서는 ‘조용한’ ‘홀로’ ‘외진’ 등의 의미를 가리키기도 한다. 구약에서 광야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만나주시고, 시험하시며, 복을 주셨던 장소였다. 특별히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은 매우 중요하였다.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광야에서의 생활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쉼’이 약속되었는데, 마가는 그 ‘쉼’을 31절에서 언급하고 있다(“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광야]에 가서 잠깐 쉬어라.”). “목자 없는 양”(34절)이란 표현은 민수기 27장 17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와 같이 묘사한 것과 유사하다.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40절)이란 표현 역시 출애굽기 18장 21절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조직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 떡과 만나 역시 매우 유사한 표현이기도 하다. 광야, 그리고 출애굽 후 약속된 땅에서의 안식은 온전하지 못했으며, 그리하여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은 장차 메시아 시대에 있게 될 더 나은 안식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히브리서 3장 7절~4장 13절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마가복음 본문 역시 이 점을 밝히고 있다. 요컨대, 마가복음의 오병이어 급식 사건에서 마가는 주님이 그 택하신 백성에게 안식을 제공하시고 또 그들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주시는 종말론 모세로 소개하고 있다고 하겠다.

현대의 어떤 독자들은 이 급식 기적을 문자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를 상식적인 방식으로 설명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첫째로, 그 중 하나의 해결방식은 떡을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각 사람은 단지 조그만 떡 조각을 받았을 뿐이며, 따라서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배불렀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의 점심 도시락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였던 소년의 관대함에 백성들이 감동이 되어 남몰래 숨겼던 자기들의 도시락을 꺼냄으로써 모든 이들이 배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초자연적 기적을 상식적으로 이해하려는 데서 비롯된 왜곡이다. 이보다는 차라리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기적을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인정해야 옳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급식 사건을 말세에 시행될 메시아 잔치에 대한 예표로써 바라보지만, 이를 지나치게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잔치에 필요한 포도주나 과일, 그밖에 다른 잔치용품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공된 음식은 가난한 갈릴리 사람들을 위한 단순한 식사로서 떡이었고 반찬으로서 약간의 생선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궁핍한 백성들에게는 매우 긴요한 음식이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주 목적이 인류의 구원으로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살아생전에 주님은 인류의 영적 구원만이 아니라, 인간의 물질적 육체적 궁핍으로의 구원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꺼이 노력하셨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주님의 사역의 방향은 오늘 우리 교회에게도 훌륭한 귀감이 된다. 교회가 영적 구원에 관심을 갖는 것이 우선적 목적이나, 사람들의 물질적, 육체적 필요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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