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33강) 현대 사역자들이 잊어버린 전도사역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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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33강) 현대 사역자들이 잊어버린 전도사역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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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7.0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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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3강)

열두 제자의 파송 사건

열두 제자 파송 사건(막 6:7-13, 30)과 이어지는 세례 요한의 순교 사건(막 6:14-29)은 마가복음의 문학적 특징 중 하나인 샌드위치 구조를 또 다시 보여준다. 주님과 세례 요한에 대한 헤롯 안디바의 반응은 열두 제자의 파송 사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구조의 의미를 설명하자면, 열두 제자의 전도는 헤롯이 예수님에 대하여 알게 되는 한 방법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은 주님을 알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죽이고 말았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였다는 것은 기독교 선교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확장될는지에 대한 암시처럼 보인다. 아울러 세례 요한의 순교는 주님의 순교에 대한 예표일 것이다. 게다가 이 두 사건은 세속 지도자의 탐욕과 잔인무도함, 제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훌륭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주님은 지상 사역 동안 두 번 이상 제자들을 전도를 위하여 파송하셨다(참고, 눅 10:1-16). 파송 사건은 우리들에게 모든 선교 사역은 주님 자신의 선교의 확장으로써 주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을 가리켜준다.

다시 말하면, 선교란 우리 인간들의 능력과 권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능력과 권위로 이뤄지는 것이며, 이는 곧 주님이 우리를 선교의 현장으로 보내실 때 사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만한 능력과 권위도 함께 제공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참고, 막 3:14-15).

먼저 여기서 ‘보내다’(apostello)란 단어는 공식적으로 권한이 위임된 사역을 가리킨다. 즉 그냥 아무런 목적도 없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갖고 보내다’란 뜻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파생한 영어가 바로 ‘사도’를 가리키는 apostle인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주님이 그 제자들을 둘씩둘씩 파송한 이유는 증인의 요건을 가리키는 유대적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신 17:6; 참고 마 18:16). 그리하여 사도행전에서 전도자들은 둘씩 짝을 지어 활동하였던 것이다(행 13:1-3; 15:39-40). 아울러 이런 관습은 개인주의를 지양하고 팀 사역의 필요성을 제시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가복음 6장 8~9절에 등장하는 여행 금지 목록은 전도 사역의 긴박성을 가리키며, 또한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배낭’이란 문자적으로 거지들의 배낭을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이는 유대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일상적이었던 관습처럼, 제자들은 구걸하지 말하는 뜻으로 풀이된다.

아니면 그냥 배낭이라면, 그 안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하는 뜻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옷’(tunic)은 보통 속옷을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두 벌 옷, 즉 여벌옷은 외투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으며, 이는 담요로 활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그들을 영접하는 집 주인들에게 담요나 이불 같은 그 밖의 필수품들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마태, 누가복음과 달리, 마가복음에서는 ‘지팡이’는 금지 목록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팡이는 수풀과 나무를 헤쳐 나갈 때 필요한 막대기와 구별되는 품목으로써, 특별히 야생 동물을 상대하여 제압할 수 있는 무기 같은 용도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지팡이가 금지목록에서 제외된 것에 대하여 여태껏 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되고 있지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마가복음의 수신 공동체의 배경이 시골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마태, 누가복음의 배경 공동체는 일반적으로 도시 공동체로 알려져 있다. 알다시피 지팡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도시에서보다는 야생 동물의 출몰이 잦은 시골에서 더 유용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초대 교회는 여기에 제시된 가르침을 후대의 전도자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것으로 생각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 바울이 이런 규정을 지켰다는 부분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11장 7-12절, 12장 13절에 의하면, 사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일하여 필요를 충당하였다. 여기에 제시된 검소한 삶의 자세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자족하는 마음은 모든 시대에 유효한 적절한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역자들에게 있어 검소한 삶과 주어진 상황에 대한 자족을 가르치시는 이러한 주님의 전도사역 매뉴얼은 거의 잊혀진 듯하여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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