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 후예라면 복음도 거침없이 전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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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후예라면 복음도 거침없이 전해야죠”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1.03.30 1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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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몽골인 신학교 세운 예장 통합 외국인 1호 목사 알탄치멕
하비스트 몽골 신학교를 설립한 슈흐바트 총장과 알탄치멕 목사(사진 오른쪽).

안정된 직업 버리고 불법 노동자로 체류 중 주님 영접
하비스트 몽골 신학교 통해 복음의 리더 양성할 터

3월 28일 월요일. 을지로교회(담임:안재평 목사) 2층 중고등부실에서 영어강의가 한창이다. 수업을 듣는 이들은 12명의 몽골인. 영어를 가르치는 이 역시 몽골인 교수다. 이제 세 번째 강의에 참여한 학생들이지만 반짝이는 눈빛으로 열정적인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 수업은 ‘하비스트 몽골 바이블 유니버시티(Harvest Mongol Bible University) ’ 1학기 강의 중 영어 수업. 신학을 배우기 위해 모인 몽골인 전문학교로 지난 14일 개교했다. 예장 통합에서 외국인으로는 처음 목사안수를 받은 몽골인 알탄치멕 목사(새문안교회 몽골인 예배 담당)를 만나기 위해 나선 곳은 뜻밖의 신학교였다.

“몽골인 신학교를 시작했어요. 1년 반 넘게 기도했던 일인데 을지로교회에서 장소를 제공해서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에서 정식으로 신학을 배울 수 없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1999년 돈을 벌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한국을 찾아왔다가 ‘하나님’을 만난 알탄치멕 목사. 몽골에서 유망한 약사였고, 살림도 넉넉한 엘리트였던 그녀는 한국에서 공장을 전전하며 갖은 고생을 하다가 목회의 길로 뛰어들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한국인도 어렵다는 장신대 신대원 공부를 마치고 지난해 정식 목사가 됐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몽골인을 위해 ‘신학교’를 세웠다. 믿음의 결단과 추진의 속도가 놀라울 뿐이었다.

‘하비스트 몽골 바이블 대학’은 미국 하비스트 신학교와 결연을 맺고 있다. 모든 커리큘럼은 미국 신학교의 것을 공유했고, 장기간 체류가 어려운 몽골인을 위해 학제를 2년 6학기로 단축했다. 동촌교회 슈흐바트 목사를 총장으로 알탄치멕 목사를 포함해 4명의 몽골인과 2명의 필리핀 교수, 미얀마와 한국인 교수까지 모두 한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거나 이수한 사람들로 교수진을 구성했다. 신구약과 성경기초, 예수님의 생애, 경배와 찬양, 영어 수업 등 다양한 커리큘럼이 짜여 있다.

학비는 1년에 100만원이지만 아직 등록금을 내지 못한 학생들도 많다. 교수들 중에는 무료로 헌신하는 이도 있고, 교통비로 2만원만 받아가는 사람도 있다. 넉넉지 않은 학교 형편이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가르치는 이도, 배우는 이도 모두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00만원이 넘는 학비를 내고 한국 신학교를 다닐 몽골인은 거의 없어요. 언어 소통의 문제도 있고, 여러 어려움이 있죠. 쉽진 않지만 신학교를 시작하고 보니 보람이 큽니다. 영어로 강의하는 교수님 수업은 슈흐바트 목사님이 몽골어로 통역해주시고, 한국어 수업은 제가 다시 몽골어로 통역하죠.”

한국에 들어온 몽골인은 모두 2만8천 명 정도로 파악된다. 단결하고 모이기를 힘쓰는 민족의 특성은 몽골인 예배를 만들었고, 국내 50여개 교회에서 몽골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한 교회당 평균 30명의 성도가 출석한다. 하지만 세례와 성찬을 베풀 수 있는 목회자는 7명에 불과하다. 몽골인 리더가 절실한 상황. 신학교를 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신학교육에 열정을 보이는 알탄치멕 목사는 한국에 오기 전 하나님을 몰랐다. 그녀의 한국행은 약국 개업의 꿈과 함께 시작됐다. 99년 관광 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왔다. 당연히 한국말은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막연히 한 달에 300달러는 쉽게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정말 큰 오산이었다.

“불법체류 상태에서 종이컵 공장과 사철공장, 비닐하우스 등을 전전하며 일을 했어요. 사장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일도 제대로 못하고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난 적도 있었죠.”

6개월이면 될 줄 알았던 한국 생활은 2년을 훌쩍 넘겼다. 기댈 곳은 교회뿐.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제게 한국말을 알아듣는 힘을 주세요.” 기도는 그녀의 귀를 열었다.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 높은뜻숭의교회 전회삼 목사가 서울장신대 편입을 주선해주었다. 알탄치멕 목사와 신학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학교에 다니면 돈을 벌 수 없어서, 몽골에 있는 가족들에게 생활비도 보낼 수 없었어요. 왜 이렇게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하나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여러 번 들었죠.”

힘들게 시작한 공부를 4년 만에 마치고,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가 2년 만에 목회학 석사를 받는 것으로 결실이 맺혔다. 신대원 재학 중 새문안교회 몽골인 예배 전담 사역자로 청빙되면서 목회도 시작했다.

한국 생활 중 어려움도 있었다. 한국으로 불러들인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2008년, 오토바이 사고로 뇌를 다치는 큰 사고를 당했다. 아들은 새벽 5시에 병원으로 실려갔다. 의사는 두 시간밖에 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들의 머리와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두 시간이면 죽을 거라던 아들은 오전 10시까지 다섯 시간을 버텼다. 다시 찍은 CT에는 놀랍게도 피가 멎어 있었다. 의사는 이틀 더 경과를 지켜본 뒤 수술을 하겠다고 했다.

“하나님, 죽어가는 아들도 살리셨는데 수술 안 하고도 건강하게 돌려주세요.” 또 다시 간절한 기도가 이어졌다. 그리고 수술 없이 아들은 2주 만에 퇴원했다. 의사들도 놀라는 기적이었다.

새 생명을 얻은 아들은 울란바토르대학에 다니면서 저녁엔 신학을 공부하고 주일엔 가정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저처럼 한국에 들어와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신학교육을 받고 리더로 서길 원했어요. 장소만 허락된다면 몽골에서 온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와 방과 후 교회, 어린이집도 운영하고 싶어요. 외국에 나가는 것만이 선교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에게 관심을 갖고 믿음의 길을 열어주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몽골 바이블 대학은 시작에 불과하다. 몽골인을 위한 대학이 아니라 외국인을 위한 대학으로 그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 오는 9월에는 필리핀 바이블 대학을 개교할 예정이다.

슈흐바트 총장은 “미국 하비스트대학을 중심으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어 충분히 가능하다”며 “졸업생들은 목회와 선교의 길로 연결해주고, 현장중심의 교육으로 전문성을 갖추기 충분하다”고 학교에 대한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슈흐바트 총장은 “목회자 성품교육은 하비스트의 장점”이라며 “지식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언행이 조화로운 성품 좋은 리더를 길러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학교를 시작하면서 본국행을 미룬 알탄치멕 목사는 아들이 목회하는 몽골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미션센터를 세우겠다는 꿈도 이야기했다. 병원과 유치원을 세워 모델이 되는 몽골 현지인교회를 꾸려 나가겠다는 것이다. 또 한국 교회와 몽골 교회를 연결하는 사역도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인 선교사가 없는 낙후된 도시에도 한국 교회들이 단기선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통로를 열어놓겠다는 것이다. 더 큰 꿈은 몽골 사회 리더로 진출하는 것. 몽골 복음화를 위해서는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을지로교회에서 장소를 허락하자 바로 신학교를 세운 몽골인들의 저력이 꼭 ‘칭기즈칸’을 닮았다. 대륙을 통치했던 칭기즈칸의 용맹에 복음이 담긴다면 어떨까? 알탄치멕 목사는 하나님을 만난 한국처럼 ‘몽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택받은 땅이 되길 소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한 용맹한 걸음은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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