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부자들이 ‘나눔과 섬김’실천한 세상 되길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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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부자들이 ‘나눔과 섬김’실천한 세상 되길 소망”
  • 이석훈 기자
  • 승인 2011.02.16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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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석성 일만사랑회 만드는 조용근 장로


한달 일만원의 사랑으로 사회를 따뜻하게 만든다
“선한 부자들 많이 나와야”… 노블레스 오블리제 강조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세무법인 석성 사무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현판이 있다. 반투명 유리 현판에는 “석성은 나눔과 섬김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듭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시대 선한 부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는 사단법인 ‘석성 일만사랑회’는 미래의 부자인 젊은층에게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기 위한 장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15년 전부터 개인재산을 출연하여 장학회를 운영해 오고 있는 조용근 장로(한영교회, 65)가 나눔과 섬김을 본격화하기 위해 사단법인 석성 일만사랑회를 설립한다.

‘한달에 1만명이 1만원씩 후원하면 1억원의 기금으로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본다’는 것이 일만사랑회의 취지이자 목표이다.

세무전문가로서 ‘세무법인 석성’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조 장로는 석성의 젊은 직원들을 중심으로 현대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독거노인과 장애우들을 돕기 위해 나눔과 섬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일만사랑회를 시작한 것이다.

석성 일만사랑회(www.seoksung.co.kr)는 우리 주위에 있는 독거노인과 중증장애우를 선정하여 생활비와 치료비, 복지용구 구입을 지원하고 정기적인 봉사활동으로 따뜻한 사랑을 전하게 된다.

또한 정기적인 소식지를 통해 자신들이 낸 1만원의 후원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확인함으로써 더욱 마음에 와 닿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누구든지 후원과 함께 봉사에 동참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일만사랑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용근 장로는 1만명이라고 하는 회원이 당장에는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나 뜻이 좋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채워준다고 확신하기에 하나하나 채워가고 있으며, 나아가 이땅에 좋은 기독교문화로 발전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조 장로는 이미 1만원의 사랑으로 작은 기적들을 체험하고 있다. 조그만 철제 저금통을 35년째 사무실 책상위에 보관한다. 출근시마다 1만원씩 넣은뒤 한달이 되면 동남아지역 BCP운동(언청이수술 지원 프로그램)에 보탠다.

최근에는 사재 5천만원으로 석성 직원들과 함께 캄보디아 똔네샵 수상 빈민촌에 ‘사랑의 무료급식소’를 지어 기증했고 1월에는 3만달러를 들여 미얀마에 학교를 지어주기도 했다.

또한 15년전부터 개인 재산을 출연해 장학회를 운영해 오다가 2002년부터는 부모님의 이름을 딴 석성장학회를 만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한해 160명씩 지원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전달한 장학금만도 12억원에 달한다.

현재 15억원의 장학기금재원을 더 늘려 보다 많은 어려운 학생들을 도울 생각이다. 지난해 10월에는 딸의 결혼식에서 받은 축의금 중 5천만원을 밥퍼센터와 가정형편이 어려운 국세청 직원의 자녀 등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조 장로는 이같은 선행으로 2006년 한국언론인연합회로부터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을 받기도 했으며, 이밖에도 대통령표창과 홍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조 장로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절에 다닐 정도의 불교신자였다. 전쟁이 나자 아버지는 징용을 피해 일본으로 가셨고, 어머니는 전쟁통에 우리끼리 살아가기 힘들다고 판단, 자식들을 데리고 경남 의령군 용덕면 외가로 들어갔다. 당시 대부분의 농촌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어머니가 혼자도 아니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들이닥쳤으니 외가에서 반가워할 리 없었다.

어린 나이지만 대가족이던 외가 식구들의 따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겨우 작은 문간방 하나를 얻은 어머니는 마치 죄인처럼, 하인처럼 집에서 일만 하며 자식들을 보살피셨다. 더부살이의 아픔을 느끼며 지내는 가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배고픔이었다. 먹을 것 자체가 없으니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결국 동생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고 조 장로는 정체불명의 고기를 계속 먹은 탓에 병상에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이 고기가 바로 쥐를 잡아 요리한 것을 안 것은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대구 달동네로 이사한 후 전도를 받고 심경이 변화를 일으킨 어머니를 따라 초등학교 3학년때 처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바로 이때부터 그를 향해 움직이셨다고 느낀다. 때로는 따라가기 싫어 짜증을 내긴 했어도 이때 교회에서 불렀던 찬송가와 목사님의 메시지가 마치 메모리칩처럼 기억 속에 차곡차곡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구달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그는 중고등부 회장까지 할 정도로 열심을 지녔다. 가정형편상 대학진학을 포기한채 세무공무원에 합격한 조 장로는 대학생 친구들이 부러워 야간대학이라도 꼭 가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하며 기도한 결과 청구대학교(현 영남대) 야간부 수석합격의 영광을 얻기까지 했으며, 서울서 공부하고 싶다는 간절함은 당시 명문인 성균관대 편입까지 이어졌다.

서울로 올라와 친구들과 어울리며 신앙을 뒤로 하고 방황하는 중에 안타깝고 슬픈 사고가 일어났다. 안동에서 교육청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다섯살 위인 형이 날씨가 추운 어느날, 술을 마시고 의식을 잃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서울에서 연락을 받고 내려가보니 형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병원에 누워있었다. 인간의 죽음이 그렇게 허망하고 간단한 것인지, 자신의 인생을 찬찬히 되짚어보게 되었다. 이때 허망한 것에 삶을 소비하면 인생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 깨닫고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나태했던 신앙을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 것을 다짐했다.

이후 조 장로의 삶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좋은 조건의 여자와 중매가 들어왔지만 교회에 다니지 않아 끝까지 거절했으며, 인생의 고비때마다 기도에 의지하여 극복할 수 있었다. 믿음없던 아버지는 결국 식도암 진단을 받은 후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늘나라로 갔으며, 아버님 유산으로 ‘석성장학회’를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조 장로는 외부 초청 강의가 있을 때마다 나눔과 섬김의 미학을 강조하며 ‘5터 이론'을 펼친다. 이 운동을 ‘나부터' ‘지금부터' ‘작은 것부터' ‘여기서부터' ‘실천 가능한 것부터'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주위에서 자꾸 닮아가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 그의 옆에서 아내와 늘 봉사하는 것을 지켜본 치과의사인 딸이 병원에서 받은 첫 봉급을 모두 석성장학금으로 내놓은 것 역시 보고 배웠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나눔과 섬김의 봉사활동이 몸에 밴 조 장로를 두고 가족들은 ‘봉사 중독자’라고 말한다. 봉사에 중독이 돼서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가 없다는 것.

“나눔은 중독입니다. 같은 일을 자꾸 하게 되면 중독이 됩니다. 남을 배려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남을 주기 위해 버는 것은 벌어서 남을 주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청량리 다일공동체 밥퍼 명예본부장으로, 사랑과 행복나눔 재단 감사로, 샘물호스피스 자문위원으로, 소망의집 운영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는 조용근 장로는 한국세무사회 회장과 천안함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 사회적인 봉사까지 펼치면서 나눔과 섬김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특히 어느 상황에서건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 조 장로의 좌우명이자 가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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