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F 이미숙 선교사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하나님을 잃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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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F 이미숙 선교사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하나님을 잃는 것"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0.12.28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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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 말기 판정으로 투병 ... "그래도 내가 제일 감사한 사람" 간증

이슬람권 국가에서 의료선교로 섬기며 복음의 감격 나눠
선교는 중단됐지만 ‘두려움’ 모르는 세대 깨어나길 기도

지난 11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은 한 달간 ‘의료선교의 달’ 행사를 진행했다. 4일 행사는 ‘선교사 가족들과 함께 하는 토크쇼’.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에 초청된 선교사가 있었다. 털모자를 쓰고 무대로 올라온 이는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온 이미숙 선교사였다.

7월 가족과 함께 선교지로 나갔다가 늑막에 물이 차는 증상이 생겨 두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병원이 내린 진단은 폐암 말기. 벼락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무대에 오른 이미숙 선교사의 얼굴을 밝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지 못한다는 거지요. 시간 시간 무너지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죽음보다 강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토록 강한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가녀린 한 여자의 삶이 궁금했다. 모두들 불행하다며 불평하고 있을 때 누구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다”는 고백만 내뱉는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지난 20일 그가 속한 ANF선교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그녀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났다.

# 첫 선교의 기억은 ‘부끄러움’

이미숙 선교사는 선교가 어렵다는 중앙아시아 A국과 B국에서 사역을 했다. A국은 전통 이슬람국가였고, B국은 극단 이슬람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누가 그녀를 선교의 길로 이끌었을까.

고3때 간호사의 길을 택한 그녀는 CCC활동을 하며 선교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왔다. 그 벅찬 감동은 잊을 수가 없었다.

대학을 마치고 강남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 간호사로 10년을 일했다. 기독교병원에서 더 큰 믿음을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병원의 바쁜 업무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고, 선뜻 선교지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대학 때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세운 그녀의 계획은 직장생활 3년에 임상경험을 쌓고 3년 정도 선교지에 나가 내 인생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이었다. 순전히 사람의 계획이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이 따로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른 채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95년 이미숙 선교사는 우간다로 첫 단기선교를 떠났다. 첫 선교에서 느낀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의료선교로 우리는 우간다 작은 부족들을 섬기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대접하며 정성껏 섬기는 모습을 보았죠. 부끄러웠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난한 아프리카 부족이 선교사들을 대접하는 모습은 지극했습니다. 병원에서의 건조한 삶을 회개하며 다시 선교훈련을 받고 영성을 채우자고 다짐했어요.”

# 당신의 하나님은 대체 누구요?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중앙아시아로 단기선교를 떠났다. 그런데 선뜻 선교를 결단할 수 없었다. 내려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시 2년의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곳에서 만난 2명의 남자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동진료센터를 운영했어요. 질병이 있으면 진단과 치료를 하지만 병명이 없을 경우에는 중보기도실로 환자를 보내죠.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목구멍에 무언가 걸렸다는데 원인이 없었어요. 중보기도실에서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했죠. 기도가 끝난 후 할아버지의 얼굴이 밝아지셨어요. 그리고 물으셨죠. ‘대체 누구에게 기도했소?’ 저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좋은 소식을 왜 이제야 전해 주냐며 원망하셨죠. 그 말씀이 가슴에 박혔어요.”

이후 진료를 받은 30대 젊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이유 없이 몸을 떨었던 이 남자는 기도 후에 떨림을 치유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동일한 고백을 들려주었다. 전율이 느껴졌다. 복음의 능력이 이런 거라면 선교에 헌신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다. 그리고 2000년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했다.

이미숙 선교사는 중앙아시아에서 3년을 사역한 후 극단 이슬람국가로 이동했다. 몸을 꽁꽁 감싸는 복장과 더위가 힘들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선교에 순종했다.

“이슬람 여성을 친구로 사귀었어요. 얼굴과 상반신에 화상을 입었는데 의사인 오빠도 남편도 아무도 돌보지 않았죠. 물어물어 우리 병원을 찾아왔어요.” 이 선교사는 극진히 간호했다. 마음을 트고 나니까 세세한 이야기를 나누며 수다를 떨 수 있었다. 그리고 복음을 전했다. 주님의 길에 어려움은 있을지 몰라도 안 되는 것은 없었다. 쉽지 않지만 복음은 그렇게 하나 둘씩 전해졌다.

# 남편을 보내주신 하나님

두 번째 사역지에서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선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지금의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게 하신 것. 주변의 소개로 이메일을 통해 6개월간 교제하던 그녀에게 권요한 씨가 찾아왔다. 그녀는 처녀였지만 남자는 재혼이었다. ‘이건 아니지요. 주님, 제게 어떻게 이런 사람을 주십니까?’ 대번에 하나님께 따졌다. 하지만 하나님은 되려 이미숙 선교사를 야단치셨다. 기도로 만나게 하고 기도로 영적 코드를 맞춰주셨다. 그리고 6개월 후 두 사람은 결혼했다.

“결혼하면 함께 선교를 가자고 했어요.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생각도 안 했었죠. 그런데 하나님은 저희 부부에게 새 생명을 선물해주셨어요.”

아들이었다. 이름은 승주. 승리의 주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이는 다운증후군이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 때 ‘믿음의 여정’이라는 책을 읽었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다시 이해해야 했어요. 우리는 피조물이고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헤아릴 수 없어도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겠다고 고백했죠.”

선교지로 나가겠다는 방향을 선회해 일단 승주의 양육에 매진했다. 그리고 승주가 세 살이 되던 올 7월. 이미숙 선교사와 남편 권요한 선교사 그리고 승주는 이 선교사가 3년을 헌신했던 중앙아시아로 떠났다.

# 폐암 말기 진단... 선교는 중단되고

이 선교사 가정은 두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선교사의 늑막에 물이 찼고 병원에서는 결핵인 것 같다고 했다. 둘째 아이도 임신 중이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결과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폐암 말기’. 진단과 함께 아이도 죽어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아, 암이라는 병이 나에게도 오는구나.’ 두려움도 몰려왔다.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눈물이 쏟아졌다. 만 하루를 울며 기도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 제 이름은 조이(JOY)지요.” 대답과 함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 내 이름이 기쁨이었구나.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었지.’ “하나님 잘못했어요. 제 이름은 조이입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고통은 만 하루에 불과했다. 눈물의 기도는 영적 세계를 열어주었다. 하나님과 주고받는 기도를 했다. 기도를 통해 들려주신 음성은 내게만이 아니었다. 남편의 울부짖음에 하나님은 “죽음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육으로는 혈육과 헤어지고 영으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은 “왜 네가 두려워하고 나를 믿지 못하느냐”고 질책했다.

# 가장 큰 두려움은 ‘하나님’

폐암 투병은 고통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귀한 시간이 됐다. 옆구리에 호스를 꽂았을 때는 숨쉬기도 어려웠다. 그 때 하나님은 “네가 십자가의 고통을 아느냐?”고 물으셨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암이라는 존재가 너무 크고 두렵게 다가왔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두려워할 대상은 암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미숙 선교사는 깨닫게 됐다. 하나님은 그 가르침을 주시려고 고통 속으로 그녀를 내몰았다. 절박한 이웃의 기도에 그저 형식적으로 부르짖은 것을 회개했다. ‘하나님을 내가 바로 알고 있었던 건가’ 회개했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녀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이유였다.

“제 안에 이성적이고 의학적인 수많은 일이 일어나겠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실 것입니다. 내 안의 암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어요.”

검사를 위해 이틀을 병원에 입원한 동안 승주는 할머니 집에 가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엄마 아빠와 떨어진 승주는 밥도 먹지 못했고, 울고 토하며 엄마를 찾았다. 이틀 만에 돌아온 아빠 품에 안겨서야 겨우 밥 한술을 삼켰다.

남편 요한 선교사는 말했다. “승주를 보고서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저 아이처럼 하나님을 찾은 적이 있었든가 회개했어요.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할 일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 곁은 떠나는 것이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암의 고통도 ‘믿음의 여정’으로 받아들이는 이미숙 선교사. 작은 여인을 통해 공동체를 깨우고, 주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 세대를 깨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다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날만 기다리는 이미숙 선교사는 싸움의 전략으로 ‘기쁨과 평안’을 내세웠다. 자신보다 치유를 더 기다리고 계실 하나님을 위해 병마와 싸워 이기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갈 꿈을 품고 있다.

고통 많은 2010년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감사와 기쁨’이 넘쳤다는 그녀의 고백에는 ‘생명’이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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