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장 귀한 유산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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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장 귀한 유산 ‘믿음’
  • 현승미 기자
  • 승인 2010.08.18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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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루스가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세계 복음주의의 한 획을 그은 영적 지도자, 빌리 그레이엄. 1949년 첫 번째 집회 이래, 빌리 그레이엄은 기독교 복음주의의 독보적인 인물이 되었다. 70년대 후반에는 그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된 이가 1억 명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탁월한 조직가로서 빌리 그레이엄전도협회를 구성해 전 세계를 무대로 집회를 열었다. 그는 지금도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전도한 위대한 부흥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만큼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엄청난 사역의 부담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들의 곁을 지킬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희생이었다. 빌리 그레이엄 자신도 집 밖에 나가 있는 동안 가족들을 그리워했고, 자녀들은 아버지가 필요한 순간마다 인내와 외로움을 쌓아가야만 했다.

“아버지는 다른 누군가 때문에 늘 바빴습니다. 하나님은 대형 스타디움에 구름떼같이 모인 사람들부터 길에서 마주친 단 한 사람의 영혼도 사랑하셨죠. 그렇기에 아버지는 기꺼이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주셨어요. 그들은 우리 가족만의 단란한 시간을 자주 방해했죠.”

1950년대 말 빌리 그레이엄이 뉴욕 집회에 참석해 이미 명성을 얻어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됐을 무렵 태어난 루스 그레이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버지와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사이였다. 그녀 역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성장기에 많은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집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었죠. 그런데, 가족끼리 외식을 하러 나가면 사람들은 종종 아버지에게 사인을 부탁하거나 영적인 고민을 나누고 싶어했습니다. 아버지와의 시간을 사람들에게 빼앗길 때 속이 상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은 늘 곁에서 아이들을 지켜 볼 수 없는 아버지였으며,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언제나 기댈 수 있는 어깨를 줄 수 있는 남편이 아니었다.

항상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지 않았으며, 때로 신앙적인 문제로 씨름하기도 했다. 친구의 배신으로 괴로워하기도 했다. 위대한 전도 사역자를 아버지로 둔 루스 그레이엄은 늘 아버지를 그리워해야 했고, 중요한 선택의 시기마다 아버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때로는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질투와 원망도 있었다.

그러나 루스 그레이엄은 자신의 상처보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바쁘고 어려운 과정 가운데서도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이 보여주었던 사랑에 주목했다. 루스는 성장기를 지나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 아버지의 위대한 사역에 존중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항상 곁에 없었다고 느꼈던 아버지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과 함께 했음을 깨닫게 됐다.

“굴곡진 삶의 여정을 반이나 지난 지금, 비록 원했던 것처럼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연스레 배우게 된 믿음의 유산을 깨달았고, 자신 역시 부모가 되어 보니 매정하게만 여겨졌던 아버지의 선택들이 진리와 진실로 일관된 삶의 결과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완벽하지 않은 빌리 그레이엄과 루스 그레이엄의 삶에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은 빌리 그레이엄을 선택하셔서 역사상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전도 사역을 감당케 하셨다. 일평생 같이 할 수 있는 동역자들을 허락하셨다.

심신의 건강이 허락지 않을 때도 설교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허락하셨다. 그저 ‘도와주소서’라는 기도에 늘 응답하셨다.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루스 그레이엄에게 바쁜 아버지 대신 좋은 사람들과 좋은 환경들을 붙여 주셨다. 때로 아버지의 사랑도 깊이 느낄 수 있는 기회들을 허락하셨다. 또한,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전도자로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들을 주셨다. 무엇보다도, 진실한 인생을 산 아버지의 딸로, 그의 모든 모습을 보고 배우게 하셨다.

자신의 삶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루스 그레이엄이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으로부터 얻은 최고의 유산인 동시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이다.

“아버지는 미국 대통령들의 조언자이자 영적 지도자였으며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의 교제가 깊었지만, 청렴함을 지키며 목사로서 자신의 소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엄청난 비극으로 인해 영적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강하게 선포함으로써 교회를 위기에서 일으켜 세우셨지요.”

냉전 시기에는 공산권에서 집회를 열어 동서 대화에 기여했으며 타종교나 다양한 문화권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접근해 소통했다. 또한,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도 관심을 기울여 다양한 자선사업을 벌였다. 덕분에 빌리 그레이엄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개신교 지도자이자 사회사업가로서 존경 받을 수 있었다.
역동적인 복음전도자로서 한 시대를 섬겼던 그의 영적 발자취는 한국 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이 방한해 여의도에서 가졌던 한국전도대회 집회는 한국 교회 대부흥의 견인차가 되었다.

“1973년 아버지는 한국을 다시 한 번 방문하셨습니다. 그 때 여의도 광장에서 가진 집회가 아마도 아버지 생애에 가장 큰 규모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한국 사람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있으십니다. 한국 사람들이 보여준, 복음에 대한 목마름과 훈련된 삶에 대한 열망에 아버지는 깊은 감명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제 연로하셔서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는 한국에서 있었던 집회와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관해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한국 교회에서 전해지는 놀라운 소식들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는 한국 교회 복음주의 운동의 지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북한을 위한 중보자이기도 하다. 빌리 그레이엄은 1992년과 1994년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하였으며, 현재도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에서 북한을 위한 사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현재 92세의 고령으로 파킨슨병과 싸우고 있지만, 아직도 전 세계 복음주의 진영의 거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빌리 그레이엄. 그리고 그가 전수한 ‘신앙의 유산’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그의 딸 루스 그레이엄. 그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은 ‘나의 아버지, 빌리 그레이엄의 유산’(한알의 밀알)에서 더 자세히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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