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도 가진 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섬김의 비전을 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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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도 가진 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섬김의 비전을 주셨죠”
  • 현승미 기자
  • 승인 2010.08.04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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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맘들과 ‘함께’하며 하나님 사랑 전하는 다비다자매회 대표 김혜란 전도사

외발수레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도 모르게 ‘아차’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금세 한쪽으로 쏟아져 버릴 것 같은 외발수레의 불안한 행보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걱정과 달리 좁은 길에 들어섰을 때나 방향을 바꿀 때는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 오히려 양발수레보다 훨씬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외발수레처럼 불완전해 보이지만, 하나님 품 안에서 그 누구보다 밝고 희망 찬 삶을 살아가는 싱글맘들이 함께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상처를 치유해가는 다비다 자매회. ‘함께’하는 것만으로 기쁨이 되는 다비다자매회의 중심에 김혜란 전도사(나눔교회·김수영 목사)가 있다.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남편이 하나님 곁으로 떠나면서 제 꿈도 함께 사라졌죠. 평생을 함께 복음 전하며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사역을 하자고 약속했는데, 제 곁에 남편이 없으니 상실감이 컸습니다. 꿈도 함께 상실되는 것 같았어요.”
 

아이들도, 경제적 어려움도, 노후도 아무것도 보장되는 것이 없었다. 그런 그가 붙든 것은 ‘사명’이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을 하는 것, 그 사명에 대한 고민을 하며, 성경을 읽던 중 ‘다비다 여제자’를 알게 됐다. 혼자 살면서 마을 과부들에게 옷을 해 입혔던 다비다 여제자. 그는 특별한 은사도, 힘도 없었다.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었지만 과부들에게 옷을 지어 입혔다. 성경에 유일하게 여제자로 일컫어질 정도로 하나님은 다비다를 귀하게 여기셨다.
 

“그 다비다 여제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제 삶의 비전을 주셨지요. 저 역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만나고, 위로해 주는 것, 위로자로 그들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 날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만나기 시작했고, 지금의 다비다 자매회를 있게 했지요.”
 

그 역시 싱글맘의 손에 자랐지만, 어머니는 그를 그 누구보다 귀하게 키우셨다. 당시 기독 명문학교였던 전주기전여중·고를 다닌 그는 학교에서 철저히 신앙으로 양육됐다. 중학교 시절 학교 부흥회에 초청된 주선애 교수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한국 여성으로 유학을 다녀와 당시 숭실대 교수였던 주 교수의 모습을 보며, 김 전도사는 자신도 그와 같은 한국 기독교여성지도자가 되겠다는 비전을 세웠다. 명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그 꿈을 더욱 키워나갔다. 그런데 결혼과 함께 연단이 시작됐다. 아니 하나님은 한 남자를 통해 그를 시험하셨다.
 

“교회 고등부에서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와 결혼을 했지요. 서로 하나님 안에서 사랑했지만, 시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동성동본에 홀어머니까지 어느 것 하나 절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셨죠. 갑작스럽게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결혼은 했지만 시어머니의 핍박은 계속 됐어요.”
 

시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시할머니의 병수발에 다섯 명의 시동생까지 모두 거둬야했다. 설상가상으로 오직 남편 한 사람만 믿고 시집 온 그였건만, 남편마저도 그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집안 형편은 어려운데, 남편은 포커게임에 빠져 밤늦게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때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지요. 소망이 없었어요. 몸무게가 42kg밖에 나가지 않았죠. 결혼생활이 너무 힘들고 지쳐 결핵에 걸리기까지 했어요.”
 

아이 둘을 낳았지만, 삶은 여전히 곤고했다. 결혼생활 5년째, 결국 그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을 결심한 순간 생각했지요. 내가 이대로 죽게 된다면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모태신앙으로 전도사인 어머니 밑에서 말씀으로 양육됐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순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제 사랑이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 사랑보다 남편 사랑을 믿었던거죠.”
 

결국 사람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비로소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 끝없는 눈물과 함께 회개와 감사의 고백이 이어졌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비로소 저의 십자가로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는 날마다 경건의 훈련을 하기 시작했지요. 화 안내기, 시할머니께 친절하기, 심지어 저녁마다 시할머니 모시고 초등학생 아이들 둘과 가정예배를 드렸어요.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그날 제가 은혜 받은 말씀을 나누었지요.”
 

자신이 변화되니 암흑같던 주변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역사하셔서 포커게임을 중단시키셨고, 가정과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셨다. 남편은 교회 봉사는 물론, 청년 교사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함께 교제를 나누고 직접 성경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남편의 직장업무로 인해 동반 유학을 앞두고 있던 상태에서 결핵이 재발하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안에서 더 큰 믿음을 갖게 해주셨다.
 

“결핵은 약만 잘 먹어도 나을 수 있는 병인데, 그냥 방치하면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기도 중에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당시 믿지 않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성경 공부 할 때였는데,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저에게 병을 주셨다는 믿음이 있었죠.”
 

그의 믿음에 하나님은 ‘완치’로 응답해주셨다. 유학 가 있는 동안에도 그들 부부의 집은 유학생이며, 교회 청년들을 섬기는 선교사의 집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귀국 후 그토록 건강하던 남편이 갑작스레 급성 폐암선고를 받게 됐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3개월 남짓이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감사하게도 3개월의 투병기간 동안 하나님은 남편이 크게 고통받지 않도록 해 주셨어요. 특별한 고통이 없어서 더욱 쾌유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요. 그러다 문득 기도 중에 하나님이 데려가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환자실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 환자용 식탁에 기댄채 꼬박 열 두시간을 보내는 남편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봤던 그날 아침 조심스레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데려가실지도 모르겠다고, 그때를 준비하자고 했지요. 그나마도 너무 미안한 마음에 간호사를 통해 전달했어요. 식사시간이 돼서 남편을 보러 중환자실에 들어갔는데, 눈조차 마주칠 수가 없더군요. 그런데 남편이 제 손을 잡으며 위로해 줬어요. 자신은 이미 죽을 준비를 마쳤다고, 오히려 제가 준비하지 못했을까봐 걱정이었다면서요.”
 

그렇게 한 달 뒤 기도원에서 남편은 눈을 감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의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들으며 행복한 모습으로 하나님 곁으로 간 것이다.
 

“그렇게 남편을 멋지게 보냈지만, 제게 밀려오는 상실감은 엄청났지요. 그 당시 남편 없는 여자는 부끄러운 존재였어요. 누구 하나 제 슬픔을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요.”
 

그렇게 아파하던 중 그는 삶의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찾았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일, 잘했다 칭찬하실 일을 찾던 중 그와 같이 홀로된 여성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다비다 자매회 사역이었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교회에서마저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지난 16년동안 올곧이 한 길을 걸어온 김혜란 전도사. 그리고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힘이 되는 다비다 자매회. 서로에 대한 위로를 넘어서서 상처받은 자녀들을 위한 캠프를 마련하고, 장학금까지 지원하며 더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고 있는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은 최근 출간된 ‘외발수레’(교회성장연구소)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 하나님 안에서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함께'하는 다비다자매회 회원들은 매년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스스로에게 '휴식'과 '위로'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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