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69강) 바울이 유대인들과의 동질성 강조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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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69강) 바울이 유대인들과의 동질성 강조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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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5.1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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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 유대인들 앞에서의 변증설교

제 1 차 선교여행 당시 소아시아 전 지역을 두루 다니며 반율법주의적인 가르침을 유포하였다고 오해를 받은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연설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행 22:1 이하). 바울을 죽이라고 외치는 그들을 향하여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지만, 정작 바울이 자신들의 언어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자 유대인 군중은 더욱 조용해졌다.

여기서 히브리 방언이란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 이유는 아람어가 당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가장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이 이 때 히브리어를 사용했다면, 유대인들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보다 조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는 아람어보다 이해하기가 좀 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청중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경건한 유대인이요 유대 율법과 관습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한다면 그들의 언어를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 특히 해외의 선교사들이 유념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바울의 설교는 세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①자신의 유대적 경건과 과거의 삶(행 22:1~5) ② 자신의 회심(22:6~12) ③ 이방인에게로 가라는 하나님의 소명(22 :13~21).

첫 번째 단원에서, 바울은 다시금 고대의 수사학적 관습을 따라 청중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혔던 것이다. 이를 위해 바울은, 첫째 히브리 방언(아람어)으로 말했으며, 둘째 청중을 부형이라 불렀고, 셋째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즉시 자신도 유대인이라 주장했으며, 넷째 가말리엘 문하에서 철저하게 바리새적 교육을 받았고, 다섯째 청중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으며, 여섯째 교회를 핍박한 것에 대한 증인으로 대제사장과 공회의 장로들에게 호소하였다. 이처럼 한 때 자신이 지금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히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는 그들의 의도 배후의 진정한 동기를 인정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도 몇 년 전에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똑같은 일을 행했다는 사실도 인정하였다.

이와 같이 바울은 항상 기독교를 전면적으로 방어하기 이전에 그의 청중들과의 공통점을 찾고자 했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먼저 우리 자신을 청중과 동일시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서 자신들과의 공통점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일 가능성은 그만큼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중과의 이러한 동질성은, 바울이 성경에 나오는 유사한 소명(召命)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던 청중에게 익숙한 형태로 자신의 회심경험을 설명하자 더욱 심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두 번째로 바울의 회심이 언급되었다(첫 번째는 9:1~18). 그런데 첫 번째 기사와 비교할 때 비슷한 점도 많지만 다른 내용도 많이 발견된다(한편, 세 번째 회심 기사는 26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다른 내용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여기서 바울이 상대하고 있는 대상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양쪽 기사에서 바울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22:7~8과 9:4~5 비교). 예수님의 이름에 출신 지역을 가리키는 “나사렛”이란 단어가 덧붙은 것은 유대인 청중에게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아나니아를 헌신적인 그리스도인가 아니라 경건한 유대인으로 묘사한 것도, 바울이 자신이 유대인임을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또한 9장의 내용과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여기서는 9장에서와는 달리, 저자인 누가가 아니라 당사자인 바울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대로 사건들을 소개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방인에게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나니아가 아니라(행 9:15~16) 바울에게(22:17~21) 직접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나아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있을 때였다는 것은 다시금 그의 유대적 신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서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잠깐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로부터의 반응을 독자들에게 준비시키기 위한 포석으로 생각된다.
                                                                                        김경진 교수<백석대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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