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일치’로 공적 행동의 모범을 보인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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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일치’로 공적 행동의 모범을 보인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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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5.1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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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종순 박사<호남신대 총장>

손양원 목사의 삶과 죽음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다. 하나는 두 아들을 죽인 학생을 양자로 받아들인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신사참배와 공산주의를 끝까지 반대한 사건이다.

전자는 기독교적 사랑의 표현이고 후자는 기독교적 신념(정절)의 표현이다. 전자는 부모로부터 배웠으며 후자는 주기철 목사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전자는 체념과 포기를 요구하지만 후자는 지킴과 양성을 요구한다.

전자의 결과는 껴안기이지만 후자의 결과는 거절이었다. 손양원 목사에게서 상반된 두 가지의 단면은 신앙의 두 모습을 마치 동전의 앞과 뒤와 같이 하나로 엮어 가는 통전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손양원 목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부모로부터 그리고 선배 주기철 목사로부터 사랑과 신앙의 정절이었다. 이것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가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낳은 자식을,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나환자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서 목회자로서 그리고 노회의 소속된 목사로서의 권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자식들을 죽인 학생을 양자로 받아들인 것은 기독교적 사랑과 감화를 통한 인간개조의 확신이었다. 마치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음으로 바뀐 것처럼 그 학생의 삶도 하나님의 사랑만 깨달으면 바뀔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행동이었다. 그리고 일제가 요구하는 신사와 점령자 공산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사상을 거부한 것은 종말론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리하여 가해자 안재선 학생을 양자로 받아들인 사건은 ‘사랑의 원자탄’ 같은 대 폭발이라기보다는 본인으로서는 지속적이며 끊임없는 내면적 투쟁이었다. 동시에 한 생명을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그리고 그 사이를 지켜보는 제3자들의 눈이 서로 뒤얽힌 복잡한 인간관계였다.

손양원 목사는 배우는 청년 시절을 보냈다. 청년 손양원은 할아버지가 선교사들로부터 물려받은 보수적인 정통신앙과 아버지로부터 애국적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여기에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를 통하여 종말론적인 영성을 덧붙였다. 청년 손양원은 말씀사랑과 기도생활 등으로 이어지는 보수적 신앙의 기초 위에 애국적인 신앙과 종말론적인 영성과 소망을 덧붙인 가운데 성장했다.

그리고 배우고 완성되는 시절과 배우고 봉사하는 전도사 시절을 보냈다. 손양원 목사는 학창시절과 학생-전도사 시절에 크게 배운 것은 길선주 목사와 주기철 목사의 기도생활에 기초한 기독교 신앙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기도와 함께 나라가 처한 현실에서 각종 유혹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는 에너지를 배웠던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에 태어나서 1950년에 죽음으로써 48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았다. 그의 생애는 태어나서 집안과 고향 교회로부터 배운 신앙과 중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한 후 경남성경학교에서 주기철 목사를 만나서 배운 신앙이 그의 삶 전체에 흐르는 맥으로 작용하였다.

이렇게 배우고 몸에 익힌 신앙은 그의 삶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실천적 신앙으로 유지된 것이다. 손양원 목사는 일생동안 내면적 투쟁 속에서 그리스도 우선적으로 살았던 한 인간이며 동시에 목회자였다. 손양원 목사의 삶과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적(私的)인 만남을 자신이 몸담고 살았던 시대의 사회 속에서 공적(公的)인 행동으로 말할 수 있었던 신행일치(신행일치)의 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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