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부활’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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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부활’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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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4.2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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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목사<서초교회>

신학생들이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해달라고 요청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빠트리지 않고 소개하는 책이 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책이다.

청년 시절에 군에 갔다 오고 대학 졸업반이 되었을 때, 필자는 진로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시기에 책꽂이 한구석에 꽂혀 있던 ‘부활’을 꺼내서 무심코 읽기 시작했다.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나는 그 밤에 ‘부활’을 다 읽었다. 그 때의 감격 때문인지 지금도 누군가에게 책을 권할 때면 가장 먼저 톨스토이의 부활을 말한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성경 다음으로 온 세상에 신앙적 영향을 미쳐온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러시아 정교회는 톨스토이에 대하여 파문을 선고한 바 있다. 러시아의 제도적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톨스토이를 파문한 것이다. 그 파문은 지금까지도 해제되지 않았다.

러시아 정교회는 그렇게 성경적으로 보이는 기독교는 아니다. 그들은 예배 중에 성경을 직접 읽고 설교하기보다는, 성경처럼 만들어진 이콘을 사용한다. 오랫동안 러시아의 국교로서 살았던 정교회 성직자들은 대단한 권력자들이다. 그런 러시아 정교회가 ‘부활’과 톨스토이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파문을 선고했다는 점이 참으로 역설적이다. 오히려 톨스토이 편에서 그들을 파문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거꾸로 된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톨스토이의 ‘부활’은 비슷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누군가의 인생을 짓밟고 죄를 지은 사람이,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 저 높은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이 가야 할 낮은 곳을 찾아가면서 ‘부활’의 내용이 진행되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이 세상에는 그렇게 거꾸로 된 경우가 많았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의 양심적 신학자들은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혁명 초기에 사회주의 정부는 신학자들에게 러시아를 떠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자유를 허용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추방과 같은 것이었다. 혁명 초기에는 그런 망령을 허락했다가 세월이 조금 흐른 다음에 그들은 생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런 시기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를 떠난 신학자들이 있었는데, 베르자예프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랑과 도피 생활을 하신 듯하다.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으로 가는 여행길에서, 어쩔 수 없이 여행하던 요셉과 마리아로부터 탄생하셨고, 얼마 안되어 애굽으로 도피하셨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는 성곽 안의 제사장들에게는 호의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은 듯하다.

이제 우리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듯하다. 과학기술이나 경제적인 지표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분야들은 세계사를 휘저으면서 많은 나라들의 성곽을 허물며 넘나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교회나 신학의 영역은 아직도 제도와 권력과 성곽 근처의 이야기에 집중해 있는 듯하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성곽을 쌓고 있었다. 그들만의 할례, 그들만의 율법, 그들만의 구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성곽 쌓는 재료가 된 셈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성곽을 허물고 성곽 너머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열심히 자기들의 성곽을 쌓는 그들이 생각할 때, 성곽 안에 있는 그들은 구원받은 자요, 성곽 밖에 있는 그들은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장차 종말이 오면 성곽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그리고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은 심판의 불 속에서 고통 중에 신음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성곽을 허물고 성곽 너머로 나가가려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성곽 안에 남으려는 자들이 심판 대상이 될 듯하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한 직무유기 비슷한 죄목으로 말이다.

오늘날 이 나라에 톨스토이 같은 사람이 있어서 ‘부활’을 새롭게 쓴다면 성곽 안에 높고 안전한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을 남자 주인공으로 내세울 것이다. 어느 순간에 그가 무언가를 깨닫고서, 성곽을 넘어 낮고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 동안에 그 영혼이 거듭나는 그런 줄거리가 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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